우리의 영원한 씨앗 우장춘 박사
기사 메일전송
우리의 영원한 씨앗 우장춘 박사 우장춘 박사 일대기 특별전시회 열려 우량종자 생산체계 확립 밑거름 역할
  • 기사등록 2005-03-20 17:19:19
기사수정

"우리는 누구의 씨앗이고, 또 씨앗을 남길거고,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영원한 거야. 그러니 나도 영원한 거지"-우장춘-


사진과 자료를 통해 ‘우장춘 박사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우장춘 박사 일대기 특별전시회’가 지난 18일부터 5월 10일까지 일정으로 농촌진흥청 농업과학관 특별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농촌진흥청(청장 손정수)이 주최한 이번 전시회는 농진청 농업과학관을 찾는 모든 관람객 이 관람할 수 있으며, 전시장에는 우장춘 박사의 탄생에서부터 사망(우장춘 박사의 묘는 농촌진흥청 구내 여기산 안장)까지 일대기가 전시돼 있다.


농진청 곽창길 기술공보담당관은 “우장춘 박사 일대기의 특별전을 통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각종 채소가 어떻게 연구발전 해 왔는지 학생들과 관심 있는 분들에게 현장 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


1896년 4월 8일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나카 사이에서 태어난 우장춘 박사는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을 가슴에 안고 학문에 열정을 피운 결과, 육종학에 대한 20여 편의 주옥같은 논문을 발표하며 당당하게 일본에서 살아왔다.


드디어 1950년 3월 8일 조국의 부름을 받고 환국해 돌아가시기까지 9년 5개월 동안 우리나라 원예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위대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통의 전보를 접하고, ‘어머니 위독’ 임종을 하기 위해 출국허가를 요청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거절한다, 출국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조의금이 전달된다, 하지만 우박사는 조의금으로 시험장에 우물이 없어 불편하니 우물을 팔 것을 지시한다.


정부는 우박사의 공로를 인정, 1959년 8월 7일 ‘문화포장’을 수여한다.


문화포장을 받고 우박사는 ‘조국이 나를 인정해 주었어’ 라며 눈물을 흘린다.


문화포장을 받은 지 3일 후, 1959년 8월 10일 한국에 온지 9년 5개월에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는 신경통 약을 장기간 복용한 결과 십이지장이 심하게 손상되고 급기야는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하는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그의 뜻대로 농촌진흥청 구내에 있는 여기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우박사의 업적으로는 겹꽃 페튜니아 개발, 종 합성 입증, 불화합성 기술개발, 한국에서의 우량종자 생산체계 확립, 밀감류 생산연구, 청정 채소재배 등이 꼽힌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05-03-20 17:19:19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