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다산초당 향하는 ‘뿌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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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다산초당 향하는 ‘뿌리의 길’ 남도 문화·낭만 따라 걷는 ‘남파랑길(13)’   
  • 기사등록 2025-05-04 08:00:01
  • 기사수정 2025-05-09 20: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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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석문공원을 빠져나와 다산권역인 전라남도인재개발원 앞으로 이동한다. 

 

전라남도 인재개발원.

전남인재개발원은 1953년 개원해 전라남도 공무원들의 역량 제고와 전문지식 함양에 정진해 왔다. 도민에게 봉사할 미래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는데, 아무래도 다산(茶山)의 정신이 깃든 목민관 양성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앞에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시작점으로 도암면 만덕리마을이다. 

 

다산초당권역 이정표.

다산박물관이 있는 만덕리(萬德里)는 남해에서 멀지 않으며, 평지가 넓은 편으로 마점·보동·귤동·덕산·신평 등 자연마을 있다. 마점은 과거에 이 마을에서 삼베를 짰다고 해서, 귤동은 과거부터 귤을 재배해서, 신평은 새로 평지에 생겨난 마을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하던 시기에 11년 동안 머물었던 다산초당(사적 제107호)이 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초입 좌측에는 다산이 47세이던 1808년 봄에 강진 보은산 고성사에서 윤씨산정(다산초당)으로 다산을 모시고 왔던 윤단(尹慱, 1744∼1821)의 집인 귤송당(橘頌堂)이 있다. 이 집은 윤단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다산 제자 윤종진의 묘.

조금 떨어진 우측에는 다산의 18제자 중 한 사람인 윤종진(尹鍾軫, 1803∼1879)의 묘가 있다. 윤종진은 다산이 해배(解配)되자 18명 제자들과 함께 다산계(茶山契)를 만들어 차를 평생 보내왔으며, 이 차의 이름이 바로 ‘금릉다산향(金陵茶山香)’이다. 

 

다산초당 가는 길.

지금은 야자메트를 깔아 많이 가려졌지만,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돌부리와 나무뿌리가 많아 발을 딛기가 쉽지 않았다. 나무들이 뿌리를 얼키설키 얽히며 내놓아, 밟고 지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걸었던 정호승 시인은 걸으면서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짓게 되고, 그 이후로 ‘뿌리의 길’로 불렸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 유상.

강진에 정약용이 처음 유배를 왔을 때 주민들은 다산 보기를 꺼려해 주막집 뒷방에 은거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따르는 자가 늘어나 그의 제자가 되게 해달라는 부탁과 가르침을 청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주막 골방에 사의재란 서당을 열었다. 사의재(四宜齋)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2007년 10월 26일 강진군에서 강진읍 동성리의 옛터에 복원했는데, 찾아보진 못했다. 

 

다산이 주막 골방 사의재(四宜齋)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 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제자를 가르치고, 독서와 집필에 몰두해 ‘목민심서·경세지표·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集子)해 만들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多産草堂)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강진에 유배 와서 겨우 주막집에 사의재를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에 놀러 갔다가 아늑하고 조용한 다산서옥(茶山書屋)을 봤는데, 사의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흔쾌히 허락했다. 정약용은 안정을 찾고 후진양성과 저서를 집필했으며, 초당을 정성을 기울여 가꿔 다산초당으로 거듭나게 한다. 

 

서암.

다산초당의 서쪽에 있는 것이 서암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동암이다. 서암(西庵)은 윤종기 등 제자 18인이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동암.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東庵)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지었다.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模刻)했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集子)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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