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영랑 김윤식은 독립지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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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영랑 김윤식은 독립지사 시인 남도 문화·낭만 따라 걷는 ‘남파랑길(15)’   
  • 기사등록 2025-05-11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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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어젯밤 늦게 전라남도 장흥에 도착해 새벽잠을 자고, 조반을 마치자마자 영랑생가로 달려왔다. 

 

원래 오늘 시작점은 도암면에 있는 강진 백련사 앞에서 시작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에서 시작한다. 강진군은 탐진강 하구와 강진만이 군의 중앙에 자리 잡아 서안으로는 신전면과 도암면이 자리하고, 동안으로는 칠량면·대구면·마량면이 위치한다. 양안의 위쪽으로 강진군청이 있는 강진읍이다. 

 

영랑생가.

영랑(永郞) 김윤식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서정시로 조국의 독립을 걱정했던 지사이자 시인이다.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영랑생가는 영랑이 1948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45년 동안 살았다. 소유권이 다른 사람으로 이전됐던 것을 강진군청에서는 재매입해 1985년에 복원해 놓았다. 

 

영랑시비 ‘모란이 피기까지는’.

영랑시비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영랑생가는 중요민속자료(제252호)로 지정됐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모란으로 꾸며 놓은 화원이 있고, 5칸 겹집의 안채와 좌측의 사랑채가 있다. 장독대 옆에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가 정겹게 서있다. 

  

영랑생가 안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 김윤식(金允植, 1903∼1950)은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살의 나이로 혼인했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한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현 휘문고)에 입학해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를 만나 문학적 안목을 키운다.

 

1980년대 영랑생가 안채.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0년에 일본 아오야마학(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시인 박용철(朴龍喆)을 만난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시문학 제1호 기념비.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해 1930년 3월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등 6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영랑좌상.

영랑은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축구와 테니스 등 스포츠를 즐기며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정부는 2008년 영랑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

후원으로 올라가면 ‘사계절 모란향기 머금은 세계모란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에는 키가 2m가 넘고 수령이 350년쯤 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이 공원의 중앙에 자리한다. 이 모란은 대구광역시의 경주김씨 고택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모란.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하는 의미로 ‘모란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모란은 목단(牧丹)이라고도 하며, 모란과 비슷한 작약(芍藥)은 모두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모란은 낙엽관목이고 작약은 다년생 풀이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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