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중국 청년이 말하는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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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하얼빈】“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알려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하얼빈역.

정면에서 본 하얼빈역. 중국 하얼빈역 소재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哈尔滨安重根义士纪念馆)’의 방명록 앞에는 이같은 내용의 안중근 의사 유언이 적혀있다.

 

현지시각 2월 23일 오후 2시에 방문한 기념관에는 다른 방문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아주 천천히 가슴에 새기며 읽다보니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게 된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전시물을 관람하는 션샤오치엔. 

5분 정도 지난 뒤 말쑥한 중국 청년이 곁으로 다가와 차분하게 전시물을 바라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영어가 더 편하다면서 능숙하게 구사한다.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출신이라는 21살 션샤오치엔(沈小倩)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한국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중국 등 억압받는 모든 나라 국민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이라며 “안중근 의사는 자유를 상징하는 정말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와 인터뷰하는 션샤오치엔(좌측).

중국 광저우시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션샤오치엔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중국 내 역사적 자취를 따라 여행하고 있다”며 “오늘 저녁 장춘(长春)으로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검색대.


기념관 내부 전시물을 관람하는 방문객들.

션샤오치엔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중국 현지에서 파견 근무를 하는 50대 한국인 남성을 비롯해 중국인 가족 등 10명 내외의 방문객들이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동상.

기념관 관계자는 “하루 평균 100명 정도가 기념관을 방문하는데, 50∼60명 정도는 한국인”이라며 “매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일인 10월 26일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말했다.

 

기념관은 2015년 10월 기준, 입장객 수가 2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하얼빈역 보수공사로 2019년 3월 30일 재개관 때까지 조선민족예술관 건물로 임시 이전했었다. 

 

기념관에는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의거 전·후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친필로 작성된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  

전시물 중 ‘안응칠역사(安應七 歷史)’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수감돼 사형 언도를 받기 전날인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3월 15일 탈고한 ‘옥중일기’ 형식으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다. 안 의사의 탄생부터 순국 전까지 삶의 역정, 민족과 국가를 위해 투쟁한 삶을 서술했다. ‘안응칠(安應七)’은 안중근 의사의 개명 전 이름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몸에 7개의 점이 있어 ‘응칠’이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기념관을 찾은 한국 관광객은 “감옥의 일본인 간수까지도 기개(氣槪)와 인품에 반해 안중근 의사를 흠모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어 알고 있다”며 “한·중·일 모든 나라에서 존경받는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중국 땅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가를 소개한 전시물도 있다. 중국과 대만 양안(兩岸)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로 존경받고 있는 쑨원(손문)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오. 강한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토도 죄인되리”라는 추념사로 안중근 의사를 찬양했다.

 


중국 공산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로 중국공산당창시자 중 한명인 이대소(李大釗)는 1913년 5월 1일에 쓴 <암살과 군덕>에서 “암살은 영웅의 행위이며 매국노를 없애고 왜를 죽이고 의협심을 키워주는 공적이 감로양지에 비할 수 있다. 삼한은 이미 합병되었고, 분노한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고, 격분한 이재명이 이완영을 사격했다. 비록 조정은 망했어도 군덕은 약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삽화.

전시물에는 1919년 이대소가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다’라는 그림자인형극을 창작해 공연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영국 기자 찰스 모리모는 기사에서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되었다”고 기술했다.


하얼빈역 승강장에 표시된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위치.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에 표시된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위치. 기념관 한쪽 끝에는 현재도 이용되는 하얼빈역 승강장이 바라다 보이는 유리창이 있다. 그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위치와 이토 히로부미가 총을 맞은 장소가 표시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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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2-24 0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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