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왜구 물리치려 지은 ‘감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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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왜구 물리치려 지은 ‘감은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14)  
  • 기사등록 2024-08-31 09: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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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감은사지(感恩寺址)로 향한다. 

 

감은사지.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이다. 문무왕(文武王)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왜구의 침략이 잦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 못하고 아들인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에 완성했다.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내 달라”는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대왕암에 장사지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址)’라고 했다. 

 

감은사지 가람 배치도.

감은사는 금당, 강당, 중문이 한 줄로 배치돼 있다. 금당 앞에는 쌍탑(雙塔)이 있고, 건물들을 회랑으로 두른 신라 중기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보여 준다. 이곳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이자, 호국사찰(護國寺刹)로 성전(成典)이 설치됐던 사찰이었지만,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금당 아래 석축사이로 큰 공간이 비어있는데, 이는 동해의 물이 드나드는 길로 용왕이 된 문무왕이 오던 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감은사지 동탑과 서탑.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나타나는 신라 쌍탑 가라배치의 첫 사례로, 두 탑은 이후 조성되는 양식적 토대를 제공하는 한국 석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탑의 상륜부 중앙에는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다른 오래된 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찰주는 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쇠기둥인 버팀대다. 

 

두 탑의 조립방식이나 사용된 석재의 수는 같지만, 동탑이 서탑에 비해 부재들이 조금씩 크다. 두 탑 모두 3층만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러 돌을 짜 맞춘 방식이다. 돌과 돌을 고정하기 위해 쇠로 만든 은장을 곳곳에 사용했다. 1959년과 1996년에 서탑과 동탑을 각각 해체해 수리할 때 두 탑 모두 3층 몸돌 윗부분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됐다. 이 중 외함과 내함으로 이뤄진 사리장치는 신라의 정교한 금속 공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모두 보물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대왕암.

대왕암(大王岩, 사적 158호)은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또는 수중릉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갈매기가 넘나드는 평범한 바위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에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모양으로 세워진 모습이다. 못 안의 물은 바위를 약간 덮을 정도다.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게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수로를 통해 동쪽에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간다. 

 

대왕암 해변.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은 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 문희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시키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실질적인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룬 왕으로 신라의 국격(國格)을 다시 바로 세워 새로운 나라의 틀을 다졌다. 그러나 사후에 매장(埋葬)이 되어 수중릉이 됐는지, 화장(火葬)을 한 후 유골이 뿌려진 산골처(散骨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민들은 문무대왕의 영험(靈驗)을 기다리며 해마다 ‘용왕제(龍王祭)’를 지낸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은 681년 7월 1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있다. 실은 이에 앞서 동해 대왕암 근처 바닷가를 떠나 일본으로 망명해 그가 일본 제42대 몬무천황(文武天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동북 아시아사를 전공한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의 주장이나, 일본서기, 속일본기를 통틀어 몬무천황의 생년에 관한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역사는 풀리지 않는 퍼즐 게임인가? 대왕암을 문무왕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럼 대왕암을 재발굴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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