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유네스코세계유산 ‘창녕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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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유네스코세계유산 ‘창녕고분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17)  
  • 기사등록 2024-09-08 09: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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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길을 잃어봐야 길을 알 수 있고, 위험(危險)을 겪어봐야 기회(機會)를 잡을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위기(危機)는 위험과 기회가 함축된 단어라고 하나 보다. 

 

오전에 통도사에서 영축산(靈鷲山) 가는 길을 잃어버려 영축산과 통도사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침부터 찌푸린 날씨는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영축산문(靈鷲山門) 앞을 출발한 자동차는 숨고를 틈도 없이 ‘창녕교동고분군’에 도착한다. 창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창녕고분군 지도.

경남 북부 창녕군은 동쪽으로 밀양시와 경북 청도군, 서쪽은 합천군·의령군, 남쪽은 함안군·창원시, 북쪽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고령군에 접한다. 2읍 12면으로 이뤄져 있다. 

 

창녕군은 일찍부터 신라 비사벌의 중심지였다. 문화재로는 국보(제33호)로 지정된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新羅眞興王拓境碑)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산재해 있다. 그중 하나인 교동고분군 Ⅱ지구에 도착했다. 

 

창녕고분군.

한국의 16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창녕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구릉 일대에 조성된 고대 비화가야(非火伽倻) 왕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昌寧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 서쪽으로 뻗은 교동(校洞)과 송현동(松峴洞)까지 이어진다. 고분군에는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 120여 기, 봉분이 없는 무덤 180여 기 등 모두 300여 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분포에 따라 교동 Ⅰ·Ⅱ지구, 송현동 Ⅰ·Ⅱ지구 등 4개의 지구로 나누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중소형 무덤이 밀집·분포하는 형태다. 


창녕고분군.

교동Ⅱ지구는 화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경사면과 창녕박물관 앞을 지나는 창밀로(昌密路) 서쪽의 구릉을 포함한다. 교동Ⅱ지구에서는 10·22·39호분의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중소 무덤이 밀집돼 있는 것이 확인된다. 대형 무덤들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어 3개의 작은 군집으로 다시 나뉜다. 

 

이 외에도 조사된 것은 52·54호 표형분(瓢形墳)이다. 모두 비화가야의 독특한 무덤형식인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이지만 사용한 석재와 입구를 만든 방식, 흙을 쌓아 올린 방식은 다양함을 보인다. 

 

창녕고분군 10호분.

먼저 교동Ⅱ지구 대형 무덤 중 하나인 10호분으로 다가서면 주위에 중소형 무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전형적인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배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복원된 봉분의 크기는 직경 42m, 높이 10m 정도다.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직사각형 널돌(板石)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돌방은 3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장식마구(裝飾馬具)와 같은 화려한 유물을 묻었고, 뚜껑돌 등을 거대한 화강암 9매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창녕고분군 3호분.

교동Ⅱ지구 중 위쪽에 있는 3호분은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1992년 해방 후 처음으로 발굴 조사됐다. 5세기 후반에 횡구식석실묘로 만들어진 봉분은 직경 25m, 높이 4.5m다. 봉분은 부채꼴 모양으로 돌을 쌓고 호석(護石 : 둘레돌)을 올린 다음 위를 덮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둘레돌 주위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생긴 기둥 자국이 36개나 발견됐다고 한다. 돌방에서 이어지는 널길(墓道)에서는 함께 순장한 사람의 뼈도 확인됐다. 

 

창녕고분군 52·54호분.

더 위로 올라가 교동Ⅱ지구 동쪽 구릉에 있는 52·54호분은 2015년에 발굴 조사된 무덤으로 교동지구에서 유일한 표형분(瓢形墳)이다. 54호분은 먼저 만들어진 52호분의 봉분 일부를 파내고 둘레돌을 덧붙여 봉분을 만들었다. 54호분의 동쪽 높은 곳에는 눈썹모양의 무덤 주위를 둘러 판 도랑(周溝)이 확인됐는데, 제사용으로 보이는 큰 항아리 조각과 다수의 토기 조각이 깨진 채 출토됐다. 두 봉분은 전형적인 가야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으로 대형 무덤 주변을 둘러싸는 중소형 무덤이다. 

 

39호분에서 보는 창녕고분군 전경.

39호분은 창녕고분군 안에서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고분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탁월한 위치에 있다. 봉분의 지름은 27.5m로 10호분(지름 42.2m), 7호분(지름 31.2m)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규모다. 먼저 축조된 63호분의 동쪽 경사면 위를 올라타듯이 이어 붙였다. 봉분 축조의 각 단계마다 실트질의 점토를 사용해 마감하거나, 석렬(石列)을 이용해 구획 성토한 흔적이 있어 당시 비화가야의 무덤축조기술을 살펴 볼 수 있다. 

 

발굴된 67호분 단면.

봉분 바깥으로는 평면 ‘C’자 모양의 호석을 축조했다. 호석 가까이 2m 간격으로 대형항아리를 세워 제사를 지낸 흔적도 확인됐다. 봉분을 쌓아 올라가는 과정에 독립적으로 축조한 돌덧널무덤 2기와 돌덧널 1기가 확인됐다. 이는 창녕지역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으로 현재까지 39호분과 63호분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매장형태다. 봉분 내부는 도굴에 의해 많이 훼손됐으나, 굽다리접시, 대형항아리, 쇠도끼, 쇠화살촉 등 3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67호분에서 발굴된 석재.

67호분은 교동Ⅱ지구 서쪽 무덤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그동안 무덤이 없어 실체를 모르고 있다가 2009년 주변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10호분과 마찬가지로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당시의 앞트기식돌방무덤이다. 돌방은 벽의 일부가 주택에 의해 훼손됐지만, 거의 도굴되지 않아 만들어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다. 돌방은 5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주검과 유물, 주검의 발치 쪽에서 순장자(殉葬者)가 확인됐고, 은제허리띠, 장식마구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39호분 주변 고분 배치도.

교동 고분군은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하고 일제강점기 때에 약탈적인 도굴행위로 고분이 많이 유실됐다. 1918년∼1919년에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에 의해 5∼8, 10, 11, 12, 89, 91호분 등이 발굴돼 마차 20대분과 화차2량 분의 토기와 금공예품을 비롯한 유물이 출토됐다고 한다. 조사보고서도 없고, 출토유물 대부분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창녕 송현동고분군 원경.

1918년에 21호분과 31호분이 발굴됐는데, 다행히 보고서가 간행돼 창녕지역 고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조사 이후 고분군에 대한 엄청난 도굴이 행해지고, 주변이 경작되면서 고분군은 황폐화됐다. 

 

창녕읍.

1980년대 들어 창녕군이 이 고분군에 대한 정비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1992년에는 그 계획의 일환으로 1∼5호분이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돼 고분군의 개략적인 성격을 밝힐 수 있게 됐다. 

 

창녕고분군 배롱나무.

창녕군 일대에 걸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은 본래 사적 80호의 창녕교동고분군(昌寧校洞古墳群)과 사적 81호의 창녕송현동고분군(昌寧松峴洞古墳群)으로 분리돼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인접지역에 있는 두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했다. 

 

천오백년 이상 지난 가야시대의 창녕고분군은 현재의 시각으로 봐도 상당히 정교하며, 고급 기술이 쓰였을 것 같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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