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퇴계 이황 후학 양성한 ‘도산서당’
기사 메일전송
<와야(瓦也) 연재>퇴계 이황 후학 양성한 ‘도산서당’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9)
  • 기사등록 2024-08-11 09:24:44
기사수정

【에코저널=서울】도산서원 양편에 있는 산기슭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도산서원 입구.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천광운영대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주자의 시 관서유감에서 나왔고, 천연대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나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시경(詩經)에서 구절에서 따왔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라는 뜻이 있다. 

 

도산서원 시사단.

주차장에서 도산서원까지는 약400여 미터로 걸어 들어간다. 가다보면 우측 낙동강 건너에는 시사단(試士壇)이 외롭게 서 있다. 시사단은 1792년 3월에 정조(正祖)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세웠다.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해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과거시험을 보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정조 20)에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글로 비문을 새겨 시사단을 세웠다. 

 

그 뒤 1824년(순조 24)에 고쳐 세우고,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에서 지상 10m의 축대를 쌓아 그 위로 비각과 비를 옮겨지었다. 시사단은 경상북도유형문화재(제33호)로 지정됐고, 비각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건물로 비바람을 막기 위해 중방(中枋) 밑에 판벽(板壁)을 둘렀으며,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活柱)를 받쳐 구조적 안전을 꾀했다. 도산별과는 급제(及第) 2인, 진사 2인, 초시(初試)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특별 시험이었다. 

 

열정(冽井)-우물.

마당 우측에는 왕버들이 자기 한 몸 지탱하지 못하고 길게 누워 있다. 소수서원에 학자수가 있다면, 도산서원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있다. 옆으로 뻗어나가는 줄기가 아주 특이하고, 아름답다. 도산서당 입구에는 또 다른 큰 왕버들이 한 그루 더 있고, 네 그루의 느티나무도 있는데, 그것은 네 그루가 아니라 하나의 나무다. 지금 이 곳도 아래를 보강해서 땅을 돋우었는데 이 느티나무의 뿌리가 그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열정(冽井)-우물.

길게 누운 왕버들 끝 지점에 있는 ‘열정’이라는 우물은 도산서당이 있을 때부터 식수로 사용했다. ‘열정(冽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 맛의 옹달샘이 있다(書堂之南 石井甘冽)’라며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 가지 못하고/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열정과 관련된 글을 짓기도 했다. 

 

도산서당.

우물을 지나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도산서당’이 나온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퇴계가 만년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1560년에 완성됐으며,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었다.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부엌과 마루를 확장했고, 확장된 마루 위에는 덧지붕을 달았다. 퇴계가 머물던 방의 이름은 완락재(玩樂齋)인데, ‘완상하며 즐긴다’는 뜻이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으로 “바위에 기대서라도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의미다. 두 이름 모두 주자(朱子)의 글에서 따왔다. 

 

도산서원 진도문.

도산서당에서 진도문(進道門)을 지나면 강학(講學) 공간인 도산서원이다. 강당에서는 이곳을 찾은 많은 남녀들이 유생복을 입고 훈장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다. 

 

도산서원 강당.

도산서당은 퇴계가 생전에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라면,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건립돼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서원은 퇴계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강당을 비롯한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韓石峯)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됐다. 

 

도산서원 성덕사 삼문.

강당 뒤편에는 제향공간인 상덕사가 있다.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는 1570년 퇴계가 돌아가시고 4년 후인 1574년에 지어 위패를 봉안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향사를 받드는데, 3일 전부터 준비해 당일 오전 11시에 지낸다. 1615년(광해군 7)에는 제자 조목(趙穆, 1524∼1606)을 종향(從享)했다. 사당의 문은 삼문으로 되었는데 가운데 문은 혼(魂)이 다니는 문이며,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출입한다. 도산서원은 소수서원과 달리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구성돼 있다. 

 

도산서원 고직사.

강당 측문으로 들어가면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고직사(庫直舍)가 나온다. 전교당(典校堂)과 도산서당 왼쪽에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쳐하던 상고직사가 있고,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앞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돼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했다. 전교(典校)는 지방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해 활동하는 향교와 서원의 책임자다. 

 

청려장 등 퇴계의 유물. 고직사를 나오면 좌측으로 퇴계의 유물을 전시하는 옥진각(玉振閣)이 있다. 옥진각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 명아주대를 말려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靑藜杖), 매화무늬 벼루와 서궤(書櫃) 등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별자리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혼천의(渾天儀)도 있는데, 이는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인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이 만든 것으로, 퇴계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을 알려주고 있다. 

 

천원권 구 화폐의 도산서원.

퇴계가 임종할 때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거라”하며 유언을 했다는 매화(梅花) 나무가 있는 도산서원은 자연을 사랑했던 퇴계의 마음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퇴계의 상징이었던 회화나무가 보이질 않는다. 한 때 모 대통령이 심었다는 일본 금송(金松) 때문에 기가 눌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금송도 보이질 않는다. 천원 권 구 화폐에 실린 도산서원 전경에도 우람하게 서 있었던 두 나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회화나무는 결국 고사(枯死)했고, 금송은 말들이 많아서 2018년도에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는 전언이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4-08-11 09:24:44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