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치악산 구룡사와 강릉 초당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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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치악산 구룡사와 강릉 초당고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4)  
  • 기사등록 2024-07-27 08:55:50
  • 기사수정 2024-07-28 08: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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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치악산의 가파른 경사 길을 기어올라 영원산성을 겉만 보고 급히 내려와 점심을 하고 구룡사로 이동한다. 

 

치악산 금대리계곡.

올라가고 내려오는 동안 금대계곡의 물소리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소리가 하나 되어 마음속의 찌든 때까지 벗겨 낸다. 자연은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 자연을 사랑하면 사랑한 만큼 그 배로 베풀어 주고 사랑하지 않거나 해를 가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자연은 크고 작음을 떠나 항상 우리의 경외(敬畏)의 대상이며, 스승이다. 

 

치악산 구룡사 원통문.

치악산 정상을 중심으로 영원사가 남쪽에 있다면, 구룡사는 북쪽에 위치한다. 대한조계종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末寺)인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곳에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의상은 연못자리가 좋아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하여 용들을 물리치고 절을 지었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해서 ‘구룡사(九龍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치악산구룡사 대웅전.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이 퇴락하게 되는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진다고 하여 혈을 끊었다. 이후 절이 더욱 쇠약해져 더 이상 운영이 어려워질 때 한 도승이 나타나 혈맥을 끊어 생긴 일이라고 하면서 거북바위를 살리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도 한다. 

 

치악산구룡사 대웅전 삼존불.

조선 초기에 개축된 대웅전은 동향(東向)으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예스런 모습이 다소 감했지만, 배흘림기둥 팔작지붕으로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건물이기 때문에 지금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가지가 하향된 소나무.

구룡사 쪽에는 ‘금강소나무 숲길’이 있다. 금강소나무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사면과 능선에 자라는 소나무로 수피(樹皮)가 붉은 색을 띠는 나무다. 금강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질이 우수한 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여 궁궐의 신축이나 보수를 할 때 사용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禁標)’를 정해 엄격하게 관리했었다. 황장목은 나무의 중심부분이 황색을 띠며 나무질이 단단한 좋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치악산에도 두 개의 ‘황장금표’가 있었다. 

 

‘금강소나무’라는 예쁜 우리 고유의 이름을 놔두고, 수피가 붉은 색을 띤다는 이유로 적송(赤松)으로 통칭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식물 분포를 조사하면서 금강소나무를 일본식 ‘적송(赤松)’으로 부르게 됐다는 강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작은 것에서부터 숨어 있는 우리 것을 찾으며, 극일(克日)하는 것도 굴욕의 역사를 지우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치악산구룡사 관음전.

다시 발길은 허난설헌이 태어난 강릉 초당고택으로 이동한다. 강릉의 초당동 고택의 현재 모습은 1912년 초계정씨의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서 갖춰졌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 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바깥과 구분하는 담이 있다. 대문간 채와 직접 연결된 넓은 마당이 있는 사랑채는 안채의 건너편에 ㄱ자형으로 배치돼 안채와 연결된다. 사랑채는 전면 5칸에 원기둥을 사용했다. 

 

강릉 초당동 고택 솟을대문.

사랑채 옆에는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담을 안팎으로 쌓아서 안채에서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됐다. 우물 칸과 방앗간 옆으로 협문을 두어 여자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해 남녀의 구분을 엄격히 했다. 

 

강릉 초당고택 사랑채.

안채 뒤쪽의 후원과 사랑채 앞쪽의 마당에 있는 정원은 한국 전통의 정원 형태가 잘 나타나 있다. 

 

허균 영정.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許筠)이 태어난 곳은 강릉 사천진리 애일당(愛日堂)이며, 그의 호 교산(蛟山)은 애일당의 뒷산 이름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난 허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본명은 초희(楚姬)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다. 1577년(선조 10) 15세 때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오빠 허봉이 귀양을 가는 등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다.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룩했다. 

 

허난설헌 영정.

허난설헌은 1589년(선조 22년) 27세로 요절했으며, 유언에 따라 글들은 모두 소각됐다. 동생 허균은 평소에 보았던 글들을 기억해 내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되고, 애송됐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등 총 142수의 시가 있다.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초당동 고택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조성된 ‘허난설헌 숲’이 조성돼 있다. 허난설헌이 동생 허균과 뛰어놀았던 앞마당이 너른 소나무 숲에 바로 맞닿았다. 사시사철 시원하고 향긋한 솔바람이 불어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허난설헌 좌상.

허난설헌 솔숲은 2010년 민간환경단체인 생명의 숲과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과 ‘아름다운 누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시문학에 소질이 뛰어났던 허균이나 누이 허난설헌은 시절을 잘못 만나 불우한 생을 살았던 것 같다. 허균은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상국을 꿈꾸다가 역적으로 몰려 사지가 잘리는 거열형을 당했다. 

 

누이 허난설헌은 8세부터 시문을 쓰기 시작했다. 15세에 결혼했으나 고된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능력을 채 피우기 전에 요절했다. 

 

허난설헌은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등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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