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에코저널=서울】고창읍성에서 쫓기듯 선운사로 이동해 ‘도솔산선운사(兜率山禪雲寺)’ 편액이 걸린 일주문 앞에 당도한다.
미당 서정주 시비.
일주문 당도하기 전에 있는 선운사 시비공원은 선운사 주변에 있는 시비들로 조성한 공원이다. 시비를 중심으로 선운사의 역사와 지역 문화를 알리기 위해 건립됐다. 정확한 설립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74년 5월에 친일시인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의 ‘선운사 동구’가 시비(詩碑)로 세워지면서 공원이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선운산가비.
시비공원 안에 있는 ‘선운산가비(禪雲山歌碑)’는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의하면 ‘선운산가(禪雲山歌)’라고 하여 백제 시대에 이곳 장사인(長沙人)이 정역(征役)에 나가 만기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아내가 남편을 사모해 선운산에 올라 남편이 떠나간 곳을 바라보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노래는 전하지 않고, 1981년 고창문화원이 주관으로 친일시인 서정주의 글을 새겨 노래비를 세웠다.
도솔산선운사 일주문.
일중 김충현의 글씨로 알려진 ‘도솔산선운사(兜率山禪雲寺)’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본당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동백꽃 대신 선홍빛 꽃무릇[석산(石蒜)] 꽃 잔치가 한창이다.
선운사 승탑군.
시냇물 졸졸 흐르는 도솔천을 따라 애기단풍나무도 선운사의 가을 풍경을 향해 함께 흐른다. 길옆 숲길을 들어서면 담을 둘러친 승탑(僧塔)밭이 나온다. 승탑은 고승들의 사리탑과 비를 모신 곳으로 흔히 부도라고 하지만, ‘부도(浮屠)’는 정체불명 일본 용어여서 문화재청이 승탑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고 한다.
백파선사비(추사글씨).
이곳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선운사 고승 백파선사 긍선(白坡禪師 兢璇, 1767∼1852)을 기리는 비문이 있다. 추사는 초의선사와 막역한 친구로 초의와 이념적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백파선사를 ‘백파 망증(妄證) 15조’라는 글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사가 제주에서 해배 길에 이광사가 썼던 대흥사의 ‘대웅보전’ 글씨를 비난했던 것을 참회했던 것처럼 백파선사를 미워했던 것을 후회하며 칭송하는 비문을 썼다고 한다.
천왕문을 지나야 선운사 본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선운사(禪雲寺)는 577년(백제 27대 위덕왕 24)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한 뒤 통일신라 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평소 친하던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죽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 내려와서 사람들이 끌어올리려 했으나,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갔다는 소문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선운산 용문굴.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옷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모시며 길이 중생을 제도하게 하라”고 씌어 있는 편지가 나와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던 곳을 메워 절을 세웠는데, 바로 지금의 절터다. 이 연못에 살던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가느라고 뚫어놓은 것이 ‘용문굴’로 동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용문굴이라는 자연석굴이 있다.
선운산 마애미륵불.
절을 세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이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반성한 도적들이 소금을 구우며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며 그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보은염(報恩鹽)’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해방 전까지도 그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