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에코저널=서울】고향수와 바로 인접해 있는 곳에는 ‘관욕소(灌浴所)’라는 시설이 있다. 왼쪽이 세월각(洗月閣)이고, 오른쪽은 척주당(滌珠堂)이다.
송광사 세월각(좌)과 척주당(우).
관욕소는 천도재(薦度齋)를 드리기 전에 망자의 영혼을 목욕시키는 곳이다. 여자 망령을 위한 세월각은 ‘달 씻는 집’이고, 남자 망령을 위한 척주당은 ‘구슬 씻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성과 남성의 특성을 살린 해학적 명칭이다. 죽어서도 남녀가 유별한지 건물마저 따로 있고, 건물의 방향마저 살짝 돌아앉아 내외하는 것 같다.
송광사 침계루.
신내천과 나란히 하는 또 하나의 건물은 침계루다. 침계루(枕溪樓)는 ‘계곡을 베게 삼아 누웠다’는 뜻으로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린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계곡 옆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올렸는데,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다.
송광사 침계루 환기통.
창고로 쓰는 아래층엔 돌담처럼 벽을 쌓았다. 창고에 보관하는 물건에 공기가 통하도록 환기통을 지붕 위로 솟게 하여 생기 있게 만들었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가 돋보인다.
송광사 삼청교와 우화각.
송광사 우화각.
사찰 밖을 둘러보고 드디어 우화각을 통과한다. 우화각(羽化閣)은 삼청교(三靑橋) 위에 있는 전각이다. 삼청교는 일주문을 거쳐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로 ‘능허교(凌虛橋)’라고도 힌다. 네모난 돌 19개로 만든 홍교(虹橋)다. 우화각의 지붕은 입구에서 보면 팔작지붕으로 보이고, 출구 쪽에서 보면 ‘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보인다. 우화각 안에는 송광사를 찾았던 옛 문인들의 시가 걸려 있고, 이곳에 걸린 ‘松廣寺(송광사)’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의 글씨다.
송광사 종고루.
우화각을 통과하면 종고루(鐘鼓樓)다. 종고루에는 범종(梵鐘)과 법고(法鼓),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를 ‘사중사물(寺中四物)’ 혹은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한다. 이들 네 가지 법구는 한 곳에 설치된다. 그곳이 단층집이면 범종각(梵鐘閣), 2층의 다락집이면 범종루(梵鐘樓)라고도 한다. 먼저 법고를 울리고 나면 범종을 치고, 그것을 받아서 운판과 목어를 차례로 짧게 두드린다. 이 네 가지를 울리는 것이 예불의 시작이다.
송광사 약사전과 영산전.
종고루 옆 일직선상에는 약사전과 영산전이 거의 붙어 있다. 약사전은 경내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 안에는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 봉안돼 있다. 전면·측면이 단칸으로 된 간결한 집이면서도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됐으며, 대들보가 없는 다포(多包)식 건물이다.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단층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려고 장식해 짠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에 사용한 부재의 세부 조각이 힘차고, 간결해 조선 전기 건물의 기법을 나타낸다.
송광사 대웅보전.
종고루 앞은 본당인 대웅보전이 나온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불(佛)·법(法)·승(僧) 중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다. 승보사찰은 훌륭한 스님을 많이 배출한 사찰을 말한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을 비롯해 조선 초기 고봉국사까지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했다. 국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최고의 승직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를 일컫는데, 그런 국사가 한 절에서 열여섯 분이나 배출됐으니, 자랑할 만하다.
송광사 대밭 길.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에서 시작된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1197년(고려 명종 27)부터 1205년(희종 1)에 이르는 시기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해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이다.
송광사 세심당.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보조국사는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은 이 절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로 짓고 싶었지만, 가까운 곳에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바꿨다. 수선사라는 이름은 ‘깨달음[悟]은 혜(慧)이고 닦음[修]은 정(定)이므로 정혜(定慧)를 아우르는 것이 선(禪)이 된다’는 뜻으로 정혜결사 의미를 담고 있다.
송광사 배롱나무.
고려 희종은 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해 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수선사가 송광사로 바뀐다. 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송광사라는 절 이름이 되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송광사 침계루의 거북목각.
송광사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佛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큰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 승보전.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됐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송광사는 1842년(헌종 8)에 큰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1856년(철종 7)까지 다시 크게 중창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