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세계문화유산 ‘해인사고려대장경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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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세계문화유산 ‘해인사고려대장경판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24)  
  • 기사등록 2024-10-05 09: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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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현재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돼 있는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됐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판전 입구.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고, 이를 다시 새겨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수다라장 안쪽 입구.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해 조성한 대장경의 조판은 대몽항쟁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8년(고종 25)부터 1247년(고종 34) 사이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먼저 초조대장경의 인경본과 송의 개보장, 요의 거란장 등 여러 판본을 두루 수집했다. 이어 여러 승려들과 문인 지식인 등을 모아, 수집한 판본 등을 토대로 대장경의 원문 오탈자를 바로 잡고, 어떤 경전을 대장경에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대장경 조판에는 판본을 수집해 교감하는 일 말고도 나무를 베어 썩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바닷물에 3년 이상을 담가 기초 가공을 한다. 경판을 만들어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겨 그 위에 다시 옻칠하고, 방부처리한 후, 경판 귀퉁이에 각목과 마구리를 대고 구리판으로 네 귀퉁이를 감싸서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수많은 공정이 포함돼 있다. 그 결과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좀먹거나 뒤틀림 현상이 적게 일어나며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전 내부.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한 면에 약 23행 14자씩 새겼으므로 전체 글자 수는 5천만 자에 달한다. 경판의 재질은 산벚나무가 64%이상이고, 14%가 돌배나무, 그 나머지는 후박나무와 단풍나무라고 한다. 글자를 새기고 경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결을 메워 매끄럽게 한 다음 다시 생옻을 두 세 차례 덧칠했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8만1352매에 이르는데, 판의 앞뒤로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실제로는 16만면 이상을 새겼다. 

 

팔만대장경판전.

고려팔만대장경판은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것을 1398년(조선 태조 7)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던 절인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합천해인사로 옮겨왔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했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인수대비(仁粹大妃) 등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됐다. 이후 성종(成宗) 때 해인사의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다. 

 

팔만대장경판전 수다라장.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고려대장경의 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건물 자체도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해인사 경내에는 많은 법당이 있으나, 대부분 근세에 건립됐다. 이 장경판고만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건물에 사용됐던 와당(瓦當) 또는 평와(平瓦)에 나타나 있는 ‘弘治元年(홍치원년)’이라는 각명(刻名)으로 보아 건립연대를 1488년(성종 19)으로 추정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전 법보전.

해인사는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가 일어났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이런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건물뿐이고, 바람이 통과하는 창살뿐이다.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대부분의 전각들은 일곱 번의 대화재로 소실돼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이다. 

 

팔만대장경판전.

오래전에 이곳을 방문한 모 대통령께서는 이렇게 귀한 국보를 허술한 곳에 보관하면 손상될 것을 우려해 국가 예산으로 현대식 항온항습(恒溫恒濕)시설 등을 갖춘 건물을 지어 옮겼는데, 얼마 가지 않아 경판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어 예전의 건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1920년대 해인사.

장경각 왼쪽으로 돌아 나오다 보면 신라 말엽에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만년에 은거해 시서(詩書)에 몰입하던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고운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라와 경청했다고 한다. 최치원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후에 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나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2012년 11월 천연기념물(제541호)로 지정됐으나, 2019년 태풍 링링의 피해로 고사해 2020년 2월 3일 문화재 지정을 해제했다. 

 

성철스님 사리탑. 

해인사를 떠나기 전에 일주문에서 부근에 있는 성철스님 사리탑을 둘러본다. 성철(性徹, 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조계종의 종정(6∼7대)을 역임해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한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철의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승탑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역대 최장 기록에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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