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인도 승려 덕운 창건한 ‘천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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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인도 승려 덕운 창건한 ‘천은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27)  
  • 기사등록 2024-10-13 0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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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함양(咸陽)에서 달려와 1988년 개통된 지리산 횡단도로(지방도 861번) 꼭대기에 있는 성삼재 고개에서 숨을 고른 후, 시암재에서 구례 들녘을 바라보다 천은사로 향한다. 

 

천은사 입구.

천은사(泉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화엄사의 말사다.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로, 828년(흥덕왕 3) 인도 승려 덕운(德雲)이 창건했다. 앞뜰에 있는 샘물(甘泉)로 병든 사람을 치료했다고 해서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했다. 

 

천은사 일주문.

그 뒤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로 승격됐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렸으나, 1610년(광해군 2)에 혜정(惠淨)이 중창했다. 1679년(숙종 5)에 단유(袒裕)가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감로사에서 ‘샘이 숨은 곳’이라고 해서 천은사라고 이름 지었다. 

 

중건 당시 감로사의 샘가에는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다. 한 승려가 이를 잡아 죽였더니 그 뒤로부터는 샘이 솟아나지 않았고, 샘이 숨었다고 해서 천은사로 개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리산 천은사.(이광사 글씨)

절 이름을 바꾼 뒤 이상하게도 이 사찰에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어나서 큰 걱정거리가 됐고, 주민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 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했다. 그때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수체(水體)로 물 흐르듯 ‘智異山泉隱寺(지리산천은사)’라는 글씨에 수기를 불어 넣은 현판을 일주문에 걸게 한 뒤로는 다시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연연히 들린다고 전해 내려온다. 

 

천은사 극락보전.

1773년(영조 49)에는 큰불이 나서 여러 전각들이 다 타버렸으나, 수도암에 주거하던 혜암(慧菴)선사가 주도해 당시 남원부사 이경윤(李敬倫)과 산내 암자, 신심 단월 등과 힘을 합쳐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했다. 천은사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황폐해진 조선의 산하와 전란으로 희생된 영혼과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를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위로하고, 치료하기 위해 수륙재(水陸齋)와 천도재(薦度齋) 관련 불교의식 등을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천은사 수홍루.

천은사 상생의 길.

천은사 보리수.

현존하는 전각들은 대부분이 1774년에 중건한 것으로, 극락보전보물(제2024호)을 비롯해 팔상전(八相殿)·응진당(應眞堂)·칠성각·삼성전(三聖殿)·첨성각(瞻星閣)·감로전·불심원·회승당(會僧堂)·보제루(普濟樓)·방장선원(方丈禪院)·종무소·일주문·수홍문(垂虹門) 등이 있다. 보물로는 극락보전을 포함해 극락전아미타후불탱화(제924호)·괘불탱(掛佛幀, 제1340호), 금동불감(金銅佛龕, 제1546호),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제1888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및 대세지보살좌상(大勢至菩薩坐像, 제1889호) 등이 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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