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에코저널=서울】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다. 1566년(명종 21년)에는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됐다.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광해군 4)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됐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이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이다.
정여창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부가 처가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됐다. 자녀 균분상속제가 있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어릴 때 이름이 백욱(佰勖)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난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繁昌)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고 해서 바꿨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해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인정하고 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생이 된다. 여러 차례 천거돼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했다. 1490년(성종 21) 과거에 급제해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했으나,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돼 일처리가 공정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됐다. 호는 일두(一蠹)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그의 호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를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으로 낮춰서 부르기 위해 지었다. 이는 중국 북송 때의 유학자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됐다.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祭享)됐다.
한때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해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서(經書)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했다. 문집은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다. 무오사화 때 부인이 기록을 태워 없애버려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정문헌공실기(鄭文獻公實記)’ 속에서 전할 뿐이며,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1570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그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남계서원이 위치한 함양 땅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해서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들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으로 유명하다면, 함양은 남계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뒤쪽에 자리 잡았다. 강학공간에 속하는 건물들은 서원 영역 앞쪽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전통 배치 형식인 전학후묘(前學後廟)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초기 서원으로, 2019년도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남계서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풍영루를 지나야 한다. 풍영루(風詠樓)는 문의 기능뿐만 아니라, 2층의 누각은 유생의 휴식이나 토론의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창건 당시는 ‘준도문(遵道門)’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출입문의 기능만 하다가 이후에 출입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풍영루라는 이름은 ‘논어’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의 대 아래서 바람[風]을 쏘이고, 노래(詠)하며 돌아오겠다”는 증점(曾點)의 글에서 취한 것 같다. 증점은 공자의 제자다.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인 명성당(明誠堂)은 1559년에 완성됐다. 정면 4칸 규모의 건물에 중앙의 2칸은 마루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된 협실이다. 강당 이름 ‘명성(明誠)’은 ‘중용(中庸)’의 “밝으면 성실하다[明則誠]”에서 취했다. 강당 건물과 협실의 이름은 성리학에서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이념 세계를 건축에 반영했다. 정여창의 학덕과 정신적 풍도(風度)를 후대 사람들이 사모하고, 우러러본 데서 나온 것이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이다. 각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 쪽의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詠梅軒)이라는 누마루다.
동재와 서재는 대지의 경사를 이용해 누문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한 것으로, 지면이 낮은 쪽에는 누마루를 조성해 조망이 좋도록 해서 공간이 외부 자연으로 연장되게 했다. 누마루 아래에는 두 개의 연당(蓮塘)이 동시에 조성돼 있는데, 이런 연당이 서원에 있는 예는 드물다.
명성당 뒤편에는 1561년에 완성된 사당은 내삼문을 통해 들어간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사지 위의 높은 곳에 위치해 강당과 적극적으로 격리시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당 앞 서남쪽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데우는 곳인 전사청이 북쪽을 향해 서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는데, 강익은 정온의 외삼촌이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