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성 기자
【에코저널=청두】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중국인들에게 ‘시(詩)의 성인(聖人)’,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두보초당’ 입구.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에는 두보를 기리는 ‘두보초당(杜甫草堂, 두푸차오탕)’이 있다. 원래 초당은 두보가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청두로 와서 지은 작은 초가집 한 채였는데,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훌륭한 공원이자 박물관이 됐다.
두보가 초당을 짓고 나서 쓴 시 ‘당성(堂成)’.
‘두보초당’을 찾았는데, 두보가 초당을 짓고 나서 쓴 시 ‘당성(堂成)’이 담벼락에 돌로 새겨 붙어 있다.
背郭堂成蔭白茅(배곽당성음백모)
緣江路熟俯靑郊(연강로숙부청교)
榿林礙日吟風葉(기림애일음풍엽)
籠竹和煙滴露梢(롱죽화연적로초)
蹔止飛烏將數子(잠지비오장수자)
頻來語燕定新巢(빈래어연정신소)
旁人錯比揚雄宅(방인착비양웅택)
懶惰無心作解嘲(라타무심작해조)
성곽을 등지고 초당 지어 흰 띠풀 얹으니 강 따라 이어진 익숙한 길 걸으며, 푸른 교외를 내려다본다.
오리나무 숲은 해를 가리고 잎사귀는 바람에 읊조리는데, 농죽 숲에 포근한 안개 덮이면 가지 끝에서 이슬 떨어진다.
잠시 멈춘 까마귀는 새끼 몇 마리 거느리고 있고, 자주 찾아와 말 건네는 제비는 새로 둥지를 정했다
옆 사람은 양웅의 집 같다고 잘못 비유하지만 게으른 나는 해조 같은 글을 쓸 마음도 없다.
복원된 초당.현재 두보초당에는 깔끔하게 복원한 초당을 비롯해 두보의 작품은 물론 이백(李白), 도연명(陶渊明) 등 중국 유명 시인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두보초당 연못.
두보초당 정원.
두보초당에는 박물관 등 여러 채의 건물, 연못과 정원 등이 20만㎡(6만500평) 면적으로 조성돼 있다.
두보초당 전시관 모니터에서 두보와 이백의 각별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두보초당 전시관에는 두보와 이백의 각별한 관계도 설명하고 있다. 이백이 두보보다 11살 연상이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어울려 하남성, 산동성 일대를 유람하면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고 소개했다.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두보초당 표지석.
두보천시비 표지석.
두보초당 내부 자판기 옆면에 두보의 초상화가 있다.
두보초당에 쓰인 ‘서문’을 그대로 옮기면 두보는 중국의 위대한 시인이다. 두부초당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크고, 보존도 잘 되어 있다. 인지도가 가장 높은 두보유적지다. 중국 문학사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두보의 위대한 애국정신, 고상한 정서, 뛰어난 시외 예술 성과는 천백년을 내려오면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격려하고, 일깨우고 있다. 사람들은 초당을 찾아 두보를 기리고 있다.
신 중국이 창건된 이후 당과 국가는 두보초당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데,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등 중앙지도자들이 친히 두보초당을 견학했으며, 초당의 다각적인 발전사업을 지도했다. 해외 유명한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도 초당을 방문해 깊은 정을 역사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겼다. 전시된 소중한 사진과 제사에는 초당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정이 담겨있다. 절실한 정이 초당에 깃들여 있다.
2002년 5월 21일 장쩌민 총서기의 두보초당 시찰.
1982년 8월 김일성이 덩샤오핑과 초당을 관람하고 있다.
두보초당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사진도 걸려 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은 물론 우리나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진도 있다.
1986년 덩샤오핑이 가족과 함께 두보초당을 관람하는 모습.덩샤오핑은 두보를 아주 숭상했고, 초당을 좋아했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5차례에 걸쳐 초당을 시찰 또는 관람했다. 덩샤오핑은 “두보초당은 아주 훌륭한 곳”이라며 “청두에 와서 두보초당을 와보지 않으면 청두에 와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1958년 3월 7일 마오쩌둥이 두보초당을 찾아 두보 시집판본 등을 살펴보고 있다.
1958년 3월 7일 마오쩌둥 주석은 청두 회의에 참석하면서 여유시간을 이용해 초당을 관람했다.
마오쩌둥이 초당 사립문서각을 감상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1958년 청두 회의 중 시간을 내서 두보초당을 찾았고. 회의 기간 동안 두보의 시집 10여부를 빌려서 읽었다. 그는 두보의 시를 “정치시”라고 평했다.
마오쩌둥이 초당 영벽의 ‘화경’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의 ‘화경’.
두보의 시 가운데 “화초가 무성한 정원 오솔길은 손님이 온다는 이유로 쓸어 본적이 없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양쪽에 꽃과 나무가 심어진 오솔길이 초당으로 향했는데, 그 길이 ‘화경’으로 추측되고 있다. 마오쩌둥이 화경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명소가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