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에코저널=서울】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훌쩍 지났지만, 오늘의 휴전선 트레킹은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미수 허목 묘역.
막 시작된 여름 장마 탓에 밤새 내린 비는 심한 가뭄이 해소되지는 않았으나, 날씨는 상쾌하고 무덥다. 환절기 독감증후군 때문에 당초 계획했던 민통선 안의 출입이 어려웠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른 아침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생의 묘소를 들러본다.
양천허씨 제단.
미수 허목 묘소.
허목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남인의 영수였고, 우의정을 지냈다. 우암 송시열과 예송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 전서(篆書)체의 최고 고수다.
미수 허목 비석엔 탄흔자국이 선명하다.
미수 허목 묘역은 잘 정비돼 있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과 석물들은 한국전쟁 당시 탄흔 자국이 동족 간의 치열했던 상잔(相殘)을 얘기한다.
임진강 사장교.
‘평화누리길 11코스’로 휴전선 종주 첫 번째 종점인 미산면 동이리 입구인 사장교 밑으로 임진강 ‘주상절리대’를 마주보며 따라간다. 임진강(臨津江)은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에서 발원해 254km를 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파주로 유입되는 한강의 제1지류다. 중·상류는 휴전선 너머 북한 땅이고, 이곳 연천부터 한탄강과 합류해 한강으로 흐른다. 실질적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연천이다.
임진강폭포.
주상절리대로 형성된 임진강 절벽에는 날씨가 가물어 물줄기가 눈물 같이 떨어지는 폭포가 그늘지어 흐른다. 오토캠핑장에는 텐트촌이 형성돼 때 이른 피서객으로 붐빈다. 강둑에는 산딸기 농익어 입안에 터지고, 꽃이 닭벼슬 닮은 자귀나무는 밤새 부부의 금슬이 좋았는지 화사하다.
맨발의 투혼. 강둑길을 걷다가 때론 하천 여울 길을 만나 신발을 벗고 내를 건너야 했다. 폭이 좀 넓은 물길에서는 넓이뛰기도 하며 ‘임진강 고구려 보루 숲길’에 당도한다.
고구려 보루 표지석.
‘보루(堡壘)’는 소규모 성곽 같은 것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구조물 등을 가리킨다. 임진강과 나란히 한 ‘고성산’에는 고구려 때 만든 ‘연천 무등리 2보루’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고성산 보루.사람 발길이 뜸해 우거진 숲길을 해쳐 오르내리며 체내의 수분을 땀으로 짜내고, 숨 가쁘게 산길을 내려가니 ‘허브 빌리지’가 나온다. 신탄리 고대산 밑의 어느 식당에서의 더덕과 능이버섯으로 우려낸 오리탕 점심은 한 첩의 보약이다.
백마고지 전적비.
철원의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최고의 격전지로 열흘간 전투에 24번이나 주인이 바뀌고, 쌓인 포탄과 주검이 백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공군 3개 사단과 맞서 싸워 이긴 우리 9사단도 ‘백마부대’로 부른다. 백마고지의 점령은 광활한 철원평야를 탈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전협정에서 주도권을 잡고 협상하는데 기여했다.
철원평야 건너 평강고원.
철원평야 너머 북한 땅에는 고암산(高巖山, 일명 ‘김일성고지’)이 선명하게 보인다. 태봉국 궁예의 궁궐터는 비무장지대의 어딘가에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사람의 발길을 애타게 기다릴 것 같다.
김일성고지(맨 뒤)와 백마고지(앞).꽃사슴이 뛰놀 것 같은 평지 숲 건너에는 ‘낙타고지’와 ‘세자매봉’이 가깝게 보이고, 그 뒤로 평강고원이 손짓한다. 그 치열했던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동족의 가슴에 겨눈 총부리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빨리 통일이 오기를 소원하면서 갈 수 없는 내 땅을 뒤로하며 다시 연천으로 이동해 걷기를 시작한다.
연천군 중면 상곶리에서 ‘군남홍수조절지 댐’을 향한 길은 만만치 않다. 아니 아예 길이 없다. 강변에 우거진 풀과 나무는 정글이다. 타고 넘는 능선도 장난이 아니다.
군남홍수조절지 댐.
한고비 넘으면 더 큰 고비가 기다리고, 몇 번인가를 반복하니 있던 기운마저 바닥나는 것 같다. 풀숲을 지날 때는 벌집을 밟았는지 허벅지가 따끔하다. 걸을 때마다 벌에 쏘인 자리가 아파 온다. 조금 높은 언덕에서 해쳐 온 길을 뒤 돌아보니 내가 지내온 인생 역정 같다.
율무밭 자리.율무가 심어진 경사가 심한 비탈밭을 지나 또 한 고개를 넘으니 들녘이 보이고 종점이 보인다. 늦은 저녁에 반주 한잔은 곤한 꿈나라로 인도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