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강직한 선비 김일손 배향 ‘청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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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강직한 선비 김일손 배향 ‘청계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26)  
  • 기사등록 2024-10-12 07: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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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청계서원은 남계서원을 둘러본 후 몇 발짝 옮기면 찾을 수 있다. 이 서원은 연산군(燕山君) 때 학자인 김일손(1464∼1498)을 배향한 서원이다. 

 

청계서원 홍살문.

김일손은 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탁영(濯纓),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다.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해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됐다가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연루돼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35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됐다. 

 

청계서원 표지석.

김일손은 사관(史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23세인 148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 후 1년 뒤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해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와의 교분을 굳건히 해 나갔다. 

 

청계서원.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강직함과 선비다움이 남달랐다.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그는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 훈구파에 맞서 현실 개혁에 대한 주장을 피력했고,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하면서 부조리한 모습을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청계서원 애락당.

원래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32세 때인 1495년 청계정사를 짓고 공부하던 곳이었다. 그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폐사됐다가 그 후 그를 추모하던 유림(儒林)들이 1906년 재건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해 1907년(순종 1) 남계서원으로부터 대지를 기증받아 묘우(廟宇)를 비롯한 강당과 부속건물과 유적비 등을 건립했다. 1921년 2월 16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헌액(獻額)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청계서원 내삼문.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다. 그 뒤쪽 높은 지대 위에는 사당인 청계사(淸溪祠)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久敬齋)’와 서재인 ‘역가재(亦可齋)’가 있다. 경내에는 김일손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고,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계서원 청계사.

청계서원은 자연과 조화로운 남계서원처럼 웅장한 자태는 아니지만, 소박한 크기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안겨준다. 세월을 간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안 곳곳에 있어 그 조화로운 모습은 서원도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게 한다. 

 

청계서원 애락당 앞 소나무.

강당인 애락당(愛樂堂) 앞의 소나무는 이 서원의 많은 역사를 말없이 가슴에 품고 있다. 청계서원은 도문화재자료(제56호)로 지정됐으며,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를 지낸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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