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곡류 심한 삼척 ‘오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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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곡류 심한 삼척 ‘오십천’ 태양, 파도와 함께 걷는 ‘해파랑길’(26)  
  • 기사등록 2024-05-11 06: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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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오늘의 출발지인 덕산·맹방해변으로 이동하는데 차량진입을 막는다. ‘제6회 이사부장군배 삼척 전국 철인3종 경기대회’가 덕산해수욕장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제6회 이사부장군배 삼척 철인3종 대회.

버스에서 내려 덕봉대교를 건너 마읍천 하류를 따라 덕산해변으로 가는 도중에도 수영을 마친 선수들이 사이클의 페달을 밟으며, 빠르게 달린다. 덕산해수욕장에서는 철인3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수영경기가 한창이다.

 

수영경기.

영어의 트라이애슬론(triathlon)인 철인3종경기는 수영, 사이클, 마라톤의 세 종목을 휴식 없이 연이어 실시하는 경기다. 극한의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한다. 이 경기의 타이틀이 된 이사부(異斯夫)는 내물왕 4대손으로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지금의 독도인 우산국을 정복해 신라 영토에 편입시킨 장군으로, 독도와 관련해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이다.

 

덕봉산.

덕산과 맹방해변을 이어주던 외나무다리.

평소에 구경할 수 없는 귀한 철인3종 경기를 보고 덕봉산(德峰山, 54m) 아래로 마읍천 하구를 건널 수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맹방해변으로 가려고 했으나, 흔적만 남아 있어 그냥 뒤돌아와 다시 덕봉대교를 건너 맹방해변으로 간다.

 

덕봉대교.

맹방해수욕장 입구.

마읍천 하구.

맹방해수욕장은 30여 년 전 여름 가족과 함께 피서 왔던 곳이라 새삼 반갑다. 그 때는 마읍천 하구에는 아침마다 고깃배들이 들어와 선상 어시장이 열렸는데, 지금은 그런 흔적들이 보이질 않는다.

 

맹방해수욕장 명사십리.

맹방해수욕장은 시원하게 뻗은 명사십리(明沙十里)다. 상맹방 쪽에는 삼척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서울 성북구수련원이 있어 성북구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한다고 한다. 

 

맹방해변산림욕장.

향나무.

백사장과 솔밭사이로 난 보도를 따라가다가 맹방해변 삼림욕장으로 들어간다. 하맹방을 지나 상맹방길의 마을 어느 집 울타리 옆의 사과와 석류에 눈이 팔려 한참을 걸어가다가 또 길이 막혀 되돌아선다. 어느 집에는 꽈배기처럼 꼬아 만든 향나무가 애처롭게 서있다.

 

남쪽의 맹방해변.

북쪽의 삼척항.

별수 없이 버스에 올라 맹방에서 삼척으로 올라오는 고개까지 이동한다. 남으로는 걸어왔던 명사십리 맹방해변이 펼쳐지고, 북으로는 삼척의 오십천 하구가 보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삼척을 향해 다시 걸음을 뗀다. 경관 좋은 해변 골짜기마다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삼척시 오분해변은 실직주(悉直州, 삼척 옛 지명) 군주로 임명된 이사부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첫 출항한 지역이라고 하는데 지명만 확인하고, 지나친다.

 

삼척의 시멘트공장.

오분교차로를 지나 시멘트공장에서 시멘트를 운송하는 컨베이어시스템 벨트가 공중으로 오십천을 가로질러 삼척항으로 연결되어 있다. 

 

삼척 오십천.

삼척오십천은 삼척시와 태백시 경계인 백병산(白屛山, 1259m)에서 발원해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하천의 곡류가 매우 심해 이 하천의 하류에서 상류까지 가려면 물을 오십 번 정도 건너야 한다는 데서 ‘오십천’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오십천 유역은 일제강점기 이후 탄광의 갱목으로 쓰기 위해 아름드리나무를 남벌하고 탄광의 폐수가 흘러들어 황폐화됐으나, 지금은 원래대로 많이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삼척교.

사자상이 서있는 삼척교를 건너 육향산으로 향한다. 육향산(六香山, 25m)은 삼척시의 동쪽 정상동에 있는 산으로 죽관도(竹串島)의 육향대(六香臺)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육향산.

이 산은 본래 정라진 앞바다에 있는 죽관도라는 섬이었는데, 삼척항을 만들면서 육지와 연결되고. 이름이 육향산으로 바뀌었다. 

 

육향정.

조선시대에는 동해안의 해상방위를 총괄했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 있었으며, 정상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육향정(六香亭) 등이 있다.

 

척주동해비각.

척주동해비는 1661년(현종2)삼척부사 허목(許穆)이 동해의 풍랑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 이를 막고자 동해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비문을 새겨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을 진정시킨 비석으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한다. 그 뒤 비석이 유실된 것을 1710년(숙종 36)에 삼척부사 박내정(朴來貞)이 유실한 비석의 탁본으로 옛 비석과 같은 비석을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우전각(대한평수토찬비각).

대한평수토찬비 역시 현종 때 삼척부사로 와 있던 허목이 동해비와 같이 세운 것으로 비문은 중국 형산(衡山)의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子碑)에서 48자를 선택해 목판에 새기어 군청에 보관해 오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에 비석에 새겨 세운 것이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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