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일본, 토끼꼬리로 비하했던 ‘호미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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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일본, 토끼꼬리로 비하했던 ‘호미곶’ 태양, 파도와 함께 걷는 ‘해파랑길’(10)  
  • 기사등록 2024-03-16 08: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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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오늘 출발점인 구룡포읍 장길리는 동쪽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지역으로 수산업이 주업이다. 원래 마을이름은 ‘장구의 목’처럼 생겨서 ‘장구목마을’이었는데, 북쪽의 생길리와 합쳐지면서 두 마을의 이름을 따서 장길리가 됐다고 한다. 

 

장길리 낚시공원.

수상펜션. 방파제 안으로 해상펜션이 있어 휴식을 취하면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있고, 성화대 같은 등대가 바다 쪽으로 경계를 이룬다. 장길리낚시공원을 벗어나 하정리해안으로 넘어가는 길은 우거진 풀 섶을 해치며 앞으로 나간다.

 

하정마을 해변.

하정마을 해변에도 파도에 밀려온 해초들이 가득한데 해안의 물가에서는 사람들이 막대기에 갈고리를 달아서 우뭇가사리를 열심히 찍어낸다. 지금이 제철이라고 한다. 

 

우뭇가사리는 한천의 원료로 쓰이는데 젤리나 양갱 등에 이용되고 있다. 식이섬유소가 풍부하고 저칼로리 웰빙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번 울산 쪽에서는 장대갈고리로 미역을 채취하는 광경을 봤었다.

 

장미.

장밋빛 붉게 물든 언덕을 지나 솔밭길을 지나면 멀리 구룡포항이 보인다. 구룡포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곳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구룡포항 원경.

구룡포 전통시장.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만들고 동해 어업을 점령한 침탈현장으로, 지금도 각종 어획물이 모이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문어와 겨울이면 별미로 각광 받는 과메기는 구룡포를 더 찾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전통시장에서 시장 구경 좀 하다가 우측 골목으로 나가면 가까운 거리에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있다. 동쪽의 끝이라 일본이 가까워서 그랬는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이 건너와 거리를 형성하고 살았던 곳이다. 

 

기모노 여인.

일본식 이층집이 근대화의 유물로 지정된 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며 일본식 의상을 빌려 입고 왜식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보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을 보여주고 알려야 할 것인가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화유물로 지정된 가옥.

일본인가옥거리 중간에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청년들이 왜색(倭色)을 없애기 위해 구룡포공원에 있던 일본인 송덕비와 신사(神社)를 철거했다. 

 

구령포공원 계단.

공원 입구 계단 옆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할 때 기여한 왜인(倭人)들의 이름이 새겨진 120개의 돌기둥을 시멘트로 덮어버렸는데,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름들을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수치심이 가득한 침탈의 역사가 이곳을 찾는 일본인에게는 자긍심을 불어넣는 번영의 역사로 비칠 것 같다.

 

인동덩쿨 ‘금은화’.

구룡포 주상절리는 용암이 분출하다 그대로 멈춰버린 형태인데, 파도는 거품으로 묻어 버린다. 모진 겨울을 이겨낸 인동덩굴은 꽃이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수분(受粉)이 되면 노란색으로 변한다고 하여 ‘금은화(金銀花)’라고 하는데 해안가를 수놓는다. 

 

해신당.

바다의 안녕을 비는 ‘해신당(海神堂)’도 밀려오는 파도를 어쩌지 못한다. 

 

바위에 누운 소나무.

시추선.

바위의 소나무는 아예 파도에 눌렸는지 바위에 누워버렸다. 바닷가는 피서객들이 모여들고 바다 멀리 석유를 캐내려는지 시추탑(試錐塔)이 움직인다. 한반도의 동쪽 끝 석병리 다무포에서 바삐 오전을 마감한다.

 

대보해안.

다무포고래마을에서 해안 데크 길을 따라 강사리해안을 지나 대보리해안에 다다르자 호미곶등대가 있는 호미곶해맞이광장이 보인다. 

 

당아욱.

너울파도.

‘금규(錦葵)’라고도 불리는 당아욱이 붉은 낮별이 되어 반갑게 맞이한다. 파도는 잦아들지 않고 바위에 부딪히는 너울은 키를 더 높인다. 대보항은 국가어항으로 가자미와 문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상생의 손.

해안길 따라 도착한 곳에는 21세기를 맞는 2000년에 설치해 놓은 조형물 ‘상생의 손’이다. 한 개는 바다에서, 또 한 개는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서 있다. 

 

해맞이광장에 우뚝한 호미곶등대는 높이 26.4m, 둘레는 아래 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시공해 1908년 11월에 준공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외곶’ 등대였다가 ‘장기곶’ 등대를 거쳐 2002년에 호미곶등대로 됐고, 옆에는 1985년에 처음 문을 연 등대박물관이 함께 하고 있다.

 

문어상.

영해기준점.

해맞이광장에는 바다 위로 연결다리를 만들어 놓았고, 다리 끝에는 스카이워크를 만들어 놓았다. 들어가는 중간에는 이곳의 특산물 문어상이 있고, 입구에는 우리나라 영해(領海)를 표시할 때 기점으로 표시하는 ‘영해기준점’도 설치해 놓았다. 

 

계절별 해가 뜨는 방향.

호미곶을 중심으로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해가 뜨는 방향을 표시한 지도가 동판으로 바닥에 표시돼 있다.

 

호랑이상.

호미곶의 유래는 조선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 1509∼1571)가 쓴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조선반도는 호랑이가 앞발을 들어 중국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코, 이곳을 꼬리에 해당한다고 묘사했다. 

 

일제는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환으로 호미곶을 토끼꼬리에 비유했다. 그동안 ‘장기곶(長鬐串)’ 등으로 불리다가 2001년 12월에 정식으로 ‘호미곶(虎尾串)’이 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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