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낙동강 물 갈등 겪은 ‘물금취수장’
기사 메일전송
<와야(瓦也) 연재>낙동강 물 갈등 겪은 ‘물금취수장’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43)
  • 기사등록 2023-02-11 08:44:32
  • 기사수정 2023-12-24 08:45:24
기사수정

【에코저널=서울】낙동강물문화전시관을 지나 경부선 철도 아래로 난 개구멍 같은 통로를 통과하면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통도사의 말사인 용화사는 1471년(성종2) 통도사의 승려 성옥(性玉)이 창건했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990년대에 산신각을 새로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해 오늘에 이른다.


오봉산을 배산(背山)으로 낙동강을 임수(臨水)로 작고 아담한 경관이 좋았으나, 철길이 바로 코앞이라 기차의 소음은 무시 못 할 것 같다. 유물로는 보물 제491호로 지정된 용화사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이 석불은 높이 125cm로 신라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른 유물이다. 14세기 무렵 김해의 고암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강에서 건진 뒤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의 옛 절터에 모셔 둔 것을 이 절을 창건한 성옥이 옮겨왔다고 한다. 본래 노천에 있었으나, 1947년 법당을 중수하며 법당 안에 모셨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불상은 듬직한 인상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신체 각 부분이 두툼하고 얼굴이 네모진 덕에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고개를 약간 숙인 듯 치켜뜬 눈매는 중생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오봉산 아래로 펼쳐진 시가가 양산시 물금읍(勿禁邑)이다. ‘물금’의 유래에 대해서는 ‘신라와 가락국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때 이곳은 서로 금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합의한 것’에서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이곳이 낙동강 하류지역으로 홍수 피해가 많아 수해가 없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물을 금한다.’는 뜻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옛 지명이 황산진(黃山津)이었던 물금읍은 땅이 비옥해 쌀과 보리 등 각종 농사가 잘되는데, 최근 농경지들이 주택이나 상업용지로 바뀐다. 부산과 가까워 원예농업이 발달했고, 부산에 식수를 공급하는 물금취수장이 있다. 신도시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인구 증가추세로 외지인이 주민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부산대양산캠퍼스와 대학병원도 들어섰다. 경부선 철도와 국도·지방도 등이 읍내를 경유해 교통도 편리하다.


부산시 전체 수돗물 생산 중 23% 가량을 담당하고 있는 물금취수장은 부산광역시와 낙동강 주변 지자체와 물 분쟁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취수장 건너 김해시 상동면 매리에 있는 매리공단이다. 2006년 4월 김해시는 매리공단에 새로이 28개 공장의 설립을 인가했고, 이에 일부 부산시민과 양산시민이 공장 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하면서 부산시와 김해시 사이에 물 분쟁이 시작됐다. 결국 김해시가 2010년에 승소했으며, 상류에 위치한 대구시와 경남·북과도 가끔 첨예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물금취수장.


이미 20여 년 전에 사라진 물금나루는 유서가 아주 깊은 나루다. 신라초기 탈해왕 21년(77)에 아찬(阿湌) 길문(吉門)이 가야국과 싸워 군사 1천 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운 황산진구(黃山津口)가 바로 물금나루로 비정되고 있다. 낙동강의 월당나루를 포함해 수많은 나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편으로 낙동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루 가운데 으뜸으로 ‘나루의 뿌리’라고도 한다. 이 나루가 번성했을 때에는 노선이 세 개나 됐다. 물금나루터에 지금은 낙동강생태탐방선 물금선착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변 물금 쪽으로 ‘황산언(黃山堰)’이란 둑이 발굴된 곳이 있다. 이 유적은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양산 중산리 유물산포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최 하단에 점질토를 깔아 다진 위에 너비 290㎝, 높이 180㎝로 돌을 쌓아 골격을 만든 후 내·외부에 모래와 점토가 혼합된 흙은 겹겹이 다져 쌓은 석심토축(石芯土築) 형태의 토석혼축제언(土石混築堤堰)으로 밝혀졌다. 발굴조사결과 12세기 이전의 청자유물과 북송(北宋)시대 동전인 상부원보(祥符元寶)와 치평원보(治平元寶) 등이 발견됐다.


유적공원은 강변의 황산공원에 포함된다. 공원 안에는 ‘모래등마루’라는 곳이 있는데, 당산나무가 외롭게 지키고 있는 ‘남평마을’의 옛터다. ‘모래등’은 현 남평마을의 옛 지명으로 1938년경에 대홍수로 인해 철길 너머로 이주해 지금은 당산나무만 옛터를 지킨다. 원 당산나무는 고목이 되어 죽고 새나무가 나와 명맥을 유지한다. 원래 이 지점은 낙동강과 양산천이 만나 형성되는 삼각주(三角洲)형태의 비옥한 땅으로 하우스 등 시설농업이 주를 이뤘으나, 지금은 4대강사업으로 ‘황산문화체육공원’이 됐다.


양산시 영축산(靈鷲山, 1059m)과 천성산(千聖山, 922m) 등에서 각각 발원해 물금읍을 지나 호포 부근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드는 양산천(梁山川)은 호포교 공사가 한창으로 임시 설치된 부교(浮橋)를 건너 호포마을 앞으로 간다. 이 부교를 건너면서 조선조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화성으로 능행을 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이용했다는 사실(史實)이 퍼뜩 떠오르며, 혹시 이곳에도 배다리를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속하는 자연마을인 호포마을은 금정산(金井山, 801m)에서 낙동강(落東江) 쪽으로 여러 등성을 이루며 밀려 나와 있는 형세로 볼 때 ‘요수다의복호망월(妖獸多疑伏狐望月)형’이라 한다. 즉 ‘요사하게 의심을 품은 여우가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 여우 ‘호(狐)’자와 낙동강 변의 포구라는 ‘포(浦)’자를 붙여 호포(狐浦)가 됐다. 1925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한자를 바꾸어 호포(湖浦)가 됐다.


                               ▲양산북정리 고분군.


양산시내로 이동해 오전을 마무리하며 중식을 하고 나오는데 멀리 ‘양산북정리고분군(梁山北亭里古墳群)’이 보여 당장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적제193호로 지정(1963년 1월 21일)된 이 고분군은 양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25,994㎡로 천성산 줄기 끝부분의 서쪽 경사면에 있다. 대형분은 능선의 정상 부분에, 소형분은 주로 산기슭 쪽에 모여 분포해 있다. 이 가운데는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부부총(夫婦塚)과 금제조족(金製鳥足)의 출토로 알려진 금조총(金鳥塚)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3-02-11 08:44:32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