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밀양 ‘영남루’는 3대 누각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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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밀양 ‘영남루’는 3대 누각 중 하나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39)
  • 기사등록 2023-01-28 09:05:57
  • 기사수정 2023-12-24 08: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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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하남읍 명례리로 접어들자 밀양영화고등학교가 보인다. 2017년 3월 1일에 개교한 밀양영화고등학교는 학년 당 2개 학급이라고 한다.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명례리마을 언덕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신석복 마르코(1828∼1866)의 출생지 옆에 1928년 봉헌된 천주교 성당(지방문화재자료 제526호)이 보인다. 성당 옆 신석복의 생가터가 축사로 변해버린 것을 2006년에 발견한 후 12년이 지난 2018년 5월에 준공해 ‘천주교명례성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약한 빗발이 떨어지는 강변을 따라 밀양시 상남면 외남리 들판을 바라보며 오전을 마감하고, 오후에는 점필제 김종직생가인 추원재로 향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59호, 1986년 8월) 지정된 추원재(追遠齋)는 일선김씨 문충공파 대종회에서 소유하고 관리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 전수의 시조인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 1389년∼1456년)가 1389년 처음 거처를 정했고, 성리학의 거두인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태어나 자라고 죽은 집터다. 추원재는 밀양시 부북면 재대리에 있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은 추원재에서 부친 김숙자의 막내로 태어났다. 1453년(단종1) 23세 때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정자(正字)·교리(校理)·감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며, 문신이다. 영남학파의 종조인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意帝文)’은 사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밀양에는 김종직의 일화가 있다. 김종직이 태어나자 마을 앞 시냇물의 맛이 사흘 동안 매우 달아 내 이름을 감천(甘川)이라 불렀으며, 어릴 때 짐승의 말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을 때 유언으로 “내 관의 길이를 보통 관보다 한 자 길게 만들라”고 당부해 유언대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할 때 관만 끊기고 시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장을 할 때 보니 비록 시체지만 머리카락·손톱·발톱 등이 자라서 자신의 무죄를 무언으로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남루.


서둘러 밀양시 중앙로 밀양강변에 있는 영남루로 간다. 영남루(嶺南樓)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세워졌다가 폐사된 영남사(嶺南寺) 자리에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하고,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했다. 1459년(조선 세조5)에는 밀양부사 강숙경(姜淑卿)이 중창했고, 1542년(중종37)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됐다.


그 뒤 1637년(인조15)에 밀양부사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했고, 1834년(순조34)에 불에 탄 것을 1844년(헌종10)에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해 개창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며,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밀양강을 발아래 둔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강변 남쪽에서 바라보는 영남루의 모습이나, 영남루에서 강을 끼고 내려다보는 도심 경치가 매우 시원하다. 영남루에 올라 강을 내려다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건물이 능파당(陵波堂)이고, 오른쪽은 침류각(枕流閣)이다.


영남루를 관람하려면 신발을 벗고 능파당으로 올라가서 본루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제한인원도 한 번에 60명 이상 올라서지 못하도록 했다. 침류각 쪽으로의 출입은 본루와 연결된 월랑(月廊)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계단의 파손이 심해서 통제되고 있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당국의 배려 같다.


본루에 올라 밀양강을 내려 보이는 밀양시내는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아주 시원하게 보인다. 그러나 넓은 마루를 서성이며 내부 구조를 요모조모 살피는 재미도 또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영남제일루 편액.


본루 정면에는 구한말의 명필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洲)가 쓴 ‘嶺南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도 여러 명필가들이 남긴 편액이 많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7세의 이현석(李玄石)’이 썼다는 ‘嶺南樓(영남루)’와 ‘10세의 이증석(李憎石)’이 썼다는 ‘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가 눈에 띈다. 이밖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 문인들이 남긴 기문(記文)과 시 등이 많이 걸려 있다. 영남루는 예로부터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힌다.


                         ▲밀양강에서 본 영남루 원경.


영남루 마당 건너편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천진궁이 있다. 경남유형문화재(제117호)이며, 단군과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天眞宮)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 시조들의 위패가 있다. 이곳에서는 봄·가을로 어천대제(御天大祭, 음3월15일)와 개천대제(開天大祭, 음렬 10월 3일)를 지내며, 민족정기를 선양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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