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소학동자’ 김굉필의 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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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소학동자’ 김굉필의 로방송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30)
  • 기사등록 2022-12-25 08:47:20
  • 기사수정 2023-12-24 08: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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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출발점인 박석진교 풀 섶에는 남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인 유홍초(留紅草)가 빗방울에 간지럼을 타는지 하얀 꽃술을 혀처럼 날름거리며 붉은 얼굴을 더 붉히며 활짝 웃는다.


                                      ▲박석진교.


박석진교(礡石津橋)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성하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부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낙동강 변에 과거 박석나루[박석진]가 있어 박석진교라고 부르게 됐다.


박석나루[박석진(礡石津)]는 이 일대에서 가장 오래됐고,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이곳의 나루에서는 낙동강 수운을 이용해 인근 대구, 창녕 등지로 쌀, 보리 등의 곡물과 소금, 어물 등이 운반됐다. 고령에서 현풍장에 수박과 참외를 싣고 건너 다녔는데, 박석진교가 1996년에 가설되면서 나루의 기능은 사라졌다. 총 길이 650m, 총 폭 9m로 왕복 2차선으로 되어 있으며, 보행자의 통행을 위한 보도는 없다.


지금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玄風)은 원래 지명이름이 현풍(玄豊)이었다. 사욕에 눈이 먼 아전(衙前)들의 가렴주구가 너무 심해 ‘새로운 교화(敎化)의 땅’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람으로 1018년(고려현종 9) 이후 현풍(玄豊)의 ‘풍성할 풍(豊)’자를 ‘바람 풍(風)’자로 바꾸어 ‘고을의 곳곳마다 관리(官吏)의 교화(敎化)가 미치는 지역’이 되라는 바람으로 지명을 바꿨다. 풍기확립(風紀確立)으로 새롭게 조성된 관아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앙풍루(仰風樓)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현풍천.


박석진교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하류로 발길을 옮기면 바로 현풍천이 나온다. 현풍천(玄風川)은 비슬산 조화봉(照華峰, 1058m)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른다. 달성군 유가면 양리를 지나 양리 사효굴 남동쪽에서 쌍계천과 합류해 달성군 유가면 음리·봉리·쌍계리와 달성군 현풍면 상리·중리·하리를 지나 11.62㎞를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하천을 가로지르며 지난다.


촉촉이 젖어 있는 강둑을 지나면 갈대는 이삭을 내놓고 가을을 부채질하고, ‘뚱딴지’로 불리기도 하는 돼지감자의 노란 꽃은 무성한 풀밭을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트린다. 풀밭에 야생으로 잘 자라 먹거리가 적었던 어린 시절에는 군것질거리 외에는 별로 처다 보지도 안 했던 이 뚱딴지가 갑자기 어느 날부터 당뇨와 다이어트에 좋다는 말에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사람이 사는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로다.


강변길이 아닌 도로를 따라 고개를 올라간다. “여기 느티골과 정수골을 사이한 산등성이가 마치 다람쥐를 닮아 다람재라 불러왔다. 원래 강변 바람 쪽으로 치우친 오솔길을 버리고 산허리를 끼고 도는 새 길을 훤하게 닦고 나니 재 넘어 마을들이 이웃이 되면서 훈훈한 인정과 복지의 짐바리가 거침없이 넘나들게 됐다.(하략)” 1986년 당시 달성군수 신영식은 낙동강 푸른 물길에 상고선 줄을 잇고 흥청거리던 번영을 되찾자고 이곳 다람재에 올라 고향의 끝없는 영광을 기원했다.


고갯마루에는 김굉필의 <로방송(路傍松)> 시비(詩碑)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본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라 자칭했다.


                          ▲김굉필의 로방송 시비.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 가에 서있어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괴로워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勞勞迎送往來賓 노노영송왕래빈)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김종직은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伸寃)돼 도승지에 추증됐다.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됐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했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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