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수몰지역 문화재 ‘청풍문화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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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수몰지역 문화재 ‘청풍문화재단지’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30)
  • 기사등록 2022-03-20 02:25:04
  • 기사수정 2023-12-23 16: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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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청풍나루에서 하선(下船)해 청풍문화재단지로 이동한다. 청풍문화재단지(淸風文化財團地)는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조성한 문화재마을이다.


청풍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청풍면 읍리, 후산리, 황석리, 수산면 지곡리에 있던 마을이 문화재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있었다. 충청북도에서는 1983년부터 3년간 수몰 지역의 문화재를 원형대로 현재 위치에 이전·복원해 단지를 조성했다.


                                         ▲팔영루.


청풍문화재단지에 입장하려면 팔영루를 지나야 한다. ‘팔영루(八詠樓)’는 조선시대에 청풍부(淸風府)를 드나들던 관문이다. 팔영루라 부르는 것은 고종 때 부사 민치상(閔致庠)이 청풍팔경(淸風八景)을 읊은 팔영시(八詠詩)에서 연유한다. 숙종(肅宗) 28년(1702)에 부사(府使) 이기홍(李箕洪)이 창건하고 현덕문(賢德門)이라고 한 것을 1870년(고종 7)에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했다.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을 피해 청풍면 읍리(邑里)에서 현 위치로 이전해 현재는 청풍문화재단지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자방앗간 뒤로 제천 도화리와 후산리 등에서 충주댐 수몰로 이전해 온 고가(古家)들이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을 보여준다. 성묘 길에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은 김중명(金重明, 1614∼1685) 조각도 눈길을 끈다. 김중명은 1645년(인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효종의 북벌 계획에 참여해 선전관이 됐다. 1671년(현종 12) 영흥 대도호부사로 재직 중 관내 사노(私奴)가 주인을 죽인 사건으로 파직됐으나, 그 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만년에 청풍의 백치에 은퇴해 살았다.


지석묘(支石墓) 군을 지나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벽루(寒碧樓)가 남한강을 조망한다. 한벽루는 청풍 관아에 딸린 누각이었다.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시에서 “아름다운 경치는 호서 제일[形勝湖西第一洲]”이라고 했듯이 호서 제일의 누각으로 많은 사대부들이 풍류로 활용됐다. 특히 남한강 변의 풍광이 빼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한벽루에 올라 강물 소리 들으며 신선이 산다는 창주(滄州)에 붙어살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한벽루.


청풍 관아로 사용했던 금병헌(錦屛軒), 멋진 몸매 S라인 벚나무를 훑어보고 망월산 정상을 둘러 싼 작은 규모의 석축산성인 망월산성과 망월루에 오른다. 청풍을 삼국시대에는 사열이현(沙熱伊縣)이라 했다. 신라 문무왕13년(673)에 사열이산성(沙熱伊山城)을 늘려 쌓았다고 하는 고증이 있으나, 이와 관련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산성의 둘레는 500m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4m다. 신라 말의 작품으로 보이는 ‘물태리 석조여래입상’까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송계계곡으로 향한다.


송계계곡(松界溪谷)은 충주시(忠州市) 수안보면(水安堡面)과 제천시(堤川市)에 걸쳐있는 월악산 자락에 있는 계곡이다. 월악산(月岳山, 1097m)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흐르는 폭포가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길이 약 7㎞다. 계곡 주변에 있는 월광폭포(月光瀑布), 학소대(鶴巢臺), 자연대(自然臺), 청벽대(靑壁臺), 와룡대(臥龍臺), 팔랑소(八娘沼), 망폭대(望瀑臺), 수경대(水鏡臺) 등은 송계팔경(松界八景)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월악산 일대는 1984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송계계곡 남쪽 상류인 제천시 한수면(寒水面) 송계리(松界里)에는 사자빈신사지에는 보물로 지정(제94호, 1963년 1월)된 고려시대의 화강석 석탑이 있다.


                                  ▲사자빈신사지 석탑.


높이 4.5m의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은 상층기단 네 귀에 4구(軀)의 사자를 앉혀서 갑석을 받게 하고, 중심에는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좌상을 모셔두었다. 앉은 모양의 비로자나불좌상은 특이하게 두건을 쓰고 있으며, 뒷머리의 나비매듭 형상이 매우 흥미롭다.


하층기단 정면에 10행 79자로 적힌 명문(銘文)에는 고려현종 13년(1022)에 거란의 침탈을 불력으로 막아 태평안민을 기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이 석탑은 9층이었던 모양이나 현재 옥신(屋身)은 5층까지, 옥개석(屋蓋石)은 4층까지만 남아있다. 갑석에서와 같으나, 갑석은 아래는 하층기단갑석과 같으나, 더욱 얕게 부연이 표시됐고, 상면에는 사각형으로 16판(瓣)의 연꽃이 조각돼 탑신부를 받치게 되어 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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