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지천으로 널린 약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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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근 (변호사 법무법인 길)



【에코저널=서울】♠우리 몸의 보약, 봄나물

나물을 무치든 된장국을 끓여 먹든 갓 캔 봄나물은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입안에 군침이 돌고, 우리에게 활력을 준다. 한의학적으로 달래는 위를 건강하게 하고 장을 튼튼하게 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냉이는 간과 숙취에 좋고, 쑥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위와 고혈압에 효능이 있으며, 씀바귀는 항암, 항스트레스, 항알레르기 작용을 한다고 하니, 봄나물은 그야말로 보약이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의술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1433년(세종15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은 우리나라의 산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이용하여 치료할 수 있는 959종의 질병에 대한 1만766종의 처방을 담고 있다.


향약집성방의 편찬 후 12년 만에 만들어진 의방유취는 중국의 의술까지 망라한 6만개의 처방을 담고 있는 의학백과사전이었다. 이 의학백과사전이 얼마나 탐났던지 왜장인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을 침공하자마자 바로 이 책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보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는 원본이 없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동양의학의 최고서로 인정받는 동의보감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근세 들어 병자수호조약(1876년)이 체결되자 일본은 이를 기념하는 예물로 의방유취의 복간본을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300년 전에 훔쳐 갔던 남의 책을 가지고 와서 생색내는 뻔뻔스러움에 치가 떨릴 지경이지만, 정작 우리 것의 소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우리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조선에 유명 약재상이 없었던 이유?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사회적 혼란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백성들이 비싼 약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주변의 산과 들에서 흔히 보는 초목을 약재로 써서 천 개의 병과 만 가지 처방을 할 수 있는 책을 펴낸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인본주의와 애민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때문이다.


우리나라 산천에서 나는 수천 가지에 이르는 풀과 나무들은 어느 것 하나 약효를 가지지 않은 것이 거의 없고, 계곡 따라 흐르거나 샘솟는 물은 그냥 마셔도 별 탈이 없다. 우리의 산과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약초는 바로 '생명초'요, 계곡을 흐르는 물은 바로 '생명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큰 약재상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아버지가 약재상이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고, 중국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약재상이 많았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기록에 남을 만한 약재상이 하나도 없었을까? 그것은 우리 산천에 귀한 약초가 널려 있다시피 흔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약재상들은 진귀한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국은 물론 거친 풍랑을 무릅쓰고 외국으로 다녀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약재상은 호미와 망태를 들고 걸어서 산에 오르기만 하면 되었다.


외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다녀야 구할 수 있는 진귀한 약재를 이 땅에서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산에서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약재상이 나타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약재상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전국에 수많은 한의원이 있고, 최고의 실력을 가진 한의사들이 수두룩한데, 막상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약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전통약재 사용한 한의학 체험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1858년) 때 근대의학을 도입한다는 명분으로 한의사 제도와 한의과 대학과정을 없애 버렸다. 중국은 중의학의 발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너무 광범위하고 많아 난립하는 듯하고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 구석도 있다.


이럴 때 일본, 중국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전통약재를 사용한 우리의 우수한 한의학을 체험케 하는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한의학과 양의학을 병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약재사업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국토의 3분의 2가 산이다. 그것도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이다. 이런 귀하고 정기 서린 산을 두고 한약재를 외국에서 수입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다.


산에다 약초를 심자. 우리가 먹을 약재는 당연하고, 외국으로 수출도 하자.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삼천 동남동녀를 보냈던 우리 땅이다.


해마다 중국조정의 인삼요구로 골머리를 앓았던 우리나라다. 오죽했으면, 풍기 군수이던 주세붕 선생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인삼진상에 대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산에 인삼을 심도록 하였을까?


산이 많으니 약초 재배를 위한 땅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산중턱에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내고, 그 길을 낸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길 아래, 위의 비탈에, 숲을 해치지 않고 약초와 유실수, 버섯 등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하면 산림훼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에 대한 규제만 조금 푼다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 대대로 조상들이 태어나 삶을 영위하다가 다시 돌아가고, 우리는 물론 대대의 후손들도 살다가 묻히게 될 이 땅의 고마움과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이토록 귀중한 우리의 산을 아끼고 가꾸기 위하여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기사제휴-인사이트>

(http://www.insight.co.kr)



필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美 인디애나주립대 로스쿨(L.LM)을 마쳤다. 1993년 제3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96년 사법연수원(25기)을 수료했으며,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전력거래소 고문변호사를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 및 영산대학교 법률행정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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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2-25 13: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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