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시스템은 화쟁(和爭) 철학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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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기획국장)



【에코저널=서울】우리는 이 시대에 물질적 성장으로 육체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정신적 가치의 혼돈 속에 삶을 살고 있다. 많이 개발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이 흔히 오늘날에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 것은 그 만큼 풀고 해결해야 할 점이 많은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강 가운데 있는 선유도는 1970년 말 서울시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던 정수처리장이었다. 2002년 공원화 사업을 통해 시민의 품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옛 정수시설의 지하공간은 물을 담아 두었던 사각의 정수조였지만, 천정을 걷어내고 기둥과 벽의 잔해를 살려 식물을 심어 놓았다.


옛 구조물의 흔적을 살린 벽면에는 인공폭포수가 청각을 마사지한다. 벽면은 시각적 볼거리뿐만 아니라 정원에 습도를 조절하는 생태환경을 제공한다. 콘크리트 상판을 들어내고 남은 기둥에 담쟁이가 기생하고 있다. 마치 나무의 정령이 깃든 고대 신전을 연상케 한다. 약품 침전지였던 수로는 물을 정화하는 여러 수생식물의 성장과 정화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교육장이나, 물놀이 터로 이어진다. 콘크리트와 같은 지극히 비자연적인 자재로도 저토록 재활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공과 자연을 서로 대립시키는 생각은 진정한 환경적 가치가 아니다. 자연은 이미 거기 있었고 스스로 자생한다. 인공은 어쩔 수 없는 인간 활동의 산물이다. 이 또한 자생적인 활동이다. 문제는 인공과 자연의 조화와 영속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유효하다면, 세상의 모든 물체는 사라지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도 아울러 익힐 수 있다.


전통건물의 황토벽이며, 아파트 주변 녹지나 공원의 나무는 일부러 조성된 자연의 소유다. 인공적인 자연의 소유기 때문에 결국 인공의 운명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선유도는 새로운 인공물을 구축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재활용하여 자연과 함께 융화하며 그 가치를 살려내는 또 다른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놀고 생활할 때 인공과 자연의 질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인공과 자연의 우선순위를 따지지 않고 그 동등성을 실현하는 생태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는 이들은 오히려 자연에 순응하며, 인공의 역사도 아울러 이해할 수 있는 환경적 가치를 스스로 체득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화쟁(和爭)하며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지난 세월 우리는 빈곤 속에서 앞만 보고 무분별하게 개발에 몰두해왔지만, 자연 친화와 생태적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 수 백년 이어온 우리 고유의 화쟁철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생태 환경적 패러다임을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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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6-08 22: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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