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세계 최초 원폭 투하도시 히로시마가 외치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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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세계 최초 원폭 투하도시 히로시마가 외치는 ‘평화’
  • 기사등록 2024-05-13 08:27:44
  • 기사수정 2024-05-22 22: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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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히로시마】러시아 최고의 문호로 일컬어지는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제목을 현실로 보여주는 곳, 바로 ‘히로시마(広島)’다. 

 

현존하는 강력한 살상무기로 꼽히는 ‘원자폭탄(原子爆彈, 이하 ‘원폭’)’이 최초로 투하된 도시, 히로시마가 오늘날 평화를 외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표지석.

12일 일요일 오전, 히로시마 시(広島市) 원룸 아파트로 마련한 숙소에서 30분 정도 걸어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Hiroshima Peace Memorial Museum)’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 노면전차나 버스를 타고 쉽게 이동하지 않은 이유는 원폭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원폭 자료관 입장을 위해 줄을 선 방문객들.

일본 히로시마 현(広島県)의 현청 소재지인 히로시마 시(広島市) 중심부 나카지마구(中島區)에 위치한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이하 ‘원폭 자료관’)’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방문객 중 20∼30%는 외국 관광객이다.

 

휴대폰으로 입장권을 구매해 직원에게 보여주는 청년.

내·외국인 중 상당수는 줄을 서 입장권을 구매했는데, 젋은 친구들은 휴대폰을 이용해 앱으로 전자티켓을 사서 기다리지 않고, 빠르게 입장했다. 

 

원폭 투하 이전 평화롭던 히로시마.

평화롭던 히로시마에서 기념촬영하는 교사와 학생들 모습.

원폭돔의 건재했던 모습.

원폭투하 이후 멈춰 서 있는 시계를 그린 그림.

원폭 자료관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전시된 사진은 원폭 투하 이전의 평화롭던 히로시마의 모습이다. 이어 1945년 8월 6월 오전 8시 15분에 멈춰 서 있는 시계가 보인다.

 

원폭 자료관에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을 재현한 영상을 보는 관람객들.

미국 공군은 1945년 8월 6일, 세계 최초로 만든 핵무기 ‘리틀 보이(Little Boy)’를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에 실어 히로시마 현(広島県)의 현청 소재지인 히로시마 시(広島市)에 투하한다. 미국은 3일 뒤인 8월 9일엔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코드네임 ‘팻 맨(Fat Man)’이라는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생활’ 주제 전시관 입구.

‘잃어버린 사람들의 생활(A Lost Way of Life)’을 주제로 하는 전시관에 들어서면 원폭 투하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 시내 곳곳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원폭 투하 중심지에서 반지름 2km 이내 지역은 전면 파괴·전소됐다. 

 

원폭투하 이후 히로시마.

관람객들은 방치된 시신, 방사능을 지닌 낙진을 뒤집어 쓴 채 멍하게 서 있는 어린이, 녹아버린 철제 구조물 등 너무 잔인한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탄식을 자아낸다.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드는 원폭으로 온도가 수 백만 ℃로 올라가고, 이 열에너지는 커다란 불덩어리를 만드는데, 그 열기가 땅에 불을 붙여 작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릴 수 있다고 한다. 

 

원폭투하 이후 히로시마 시내를 하늘에서 본 모습.

원폭 자료관은 히로시마에서 14만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현 본부는 원폭 자료관 옆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세워 놓은 위령비에 “원폭 투하로 20만명이 희생됐고, 이중 10%인 2만명 가량이 조선인이었다”고 적어 놨다. 

 

미국이 일본의 여러 도시 중 히로시마를 세계 최초 원폭 투하지역으로 택한 이유는 1868년 이후 군사 중심지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원폭투하 이후 원폭돔.

토요타·혼다·닛산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현재 히로시마에 본사를 둔 자동차기업 ‘마쓰다(マツダ, MAZDA)’도 1920년에 창업한 전범기업 중 하나다. 모태는 코르크 마개를 생산하던 ‘도요코르크공업’으로, 1927년 ‘도요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삼륜차뿐 아니라 일본군의 하청을 받아 총기 등 다양한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대에는 다른 전범기업들처럼 조선인 징용자들을 이용해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도 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호주에서 온 더글라스·린다 부부.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온 노년의 더글라스(Douglas, 71·남)·린다(Lynda, 70·여) 부부는 상심이 가득한 얼굴로 “너무나도 안타깝고 비참함을 느낀다”며 “핵무기의 무서움과 공포를 느꼈다. 다시는 이같은 전쟁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글라스는 “손녀와 손녀사위, 증손자 일행과 함께 5일전 일본에 도착했다”며 “비가 내리는 날씨를 감안해 손녀 부부와 어린 증손자는 호텔에 머물게 하고, 우리만 역사적 현장을 방문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전쟁도 잘 알고 있다”며 “현재 남북관계는 어떻냐”고 묻기도 했다. 린다는 “전쟁 이후 놀라운 변화를 보이는 한국을 방문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원폭 사망자 위령비.

한국어로도 쓴 원폭 사망자 위령비 설명.

원폭 자료관 주변에는 원폭 희생자들을 위한 거대한 안장 모양의 ‘원폭 사망자 위령비(히로시마 평화도시 기념비)’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평화기념공원, 1996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원폭돔’ 등이 위치한다. 

 

히로시마 원폭 조선인 희생자를 3~4만명 가량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다. 위령비 희생자 명단에는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약 2500명 가량만 넣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합치면 약 6만명에서 최대 7만명까지 조선인 원폭 희생자가 있다고 한다. 

 

조선인 위령비.

조선인 위령비 설명.

조선인 위령비와 원폭 자료관 등을 둘러 본 한국인 관광객은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의 거듭되는 항복 요구에 끝까지 항전 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일본의 무모함이 원폭투하라는 참사로 이어진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며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여러 국가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 없이 ‘피해자 코스프레’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폭돔.

5층으로 된 중심 코어(core)가 있는 3층의 벽돌 건물 ‘원폭돔’은 폭탄 투하 중심지 건물 중 완파되지 않은 유일한 유물이다. ‘산업장려관(広島県産業奨励館)’이었던 원폭돔의 골조가 건재해 생존자가 있었을 것으로 오해하지만, 당시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즉사했다. 

 

일본 히로시마 평화의 공원에서의 메시지 ‘NO MORE HIROSHIMAS’와 ‘사랑과 평화’를 적은 기념 스티커.길이 3m, 폭 70cm, 무게 4톤의 리틀보이에 의해 페허가 됐던 히로시마가 현재는 핵무기 금지를 위한 평화운동의 정신적 중심지가 됐다. 1947년 원자폭탄희생자협회가 창설돼 방사선의 영향에 대한 의학적·생물학적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1952년부터 매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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