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에 관한 단상 - 말과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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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해 어린아이를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뉴스를 접하며 시위 현장에서 쓰러진 포항 건설 노조원 하중근 씨의 사망 소식을 참담한 심정으로 들으며 생각해 본다. 이러한 비극을 끝장내고 살수는 없을까?


비극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에게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뼛속 깊숙이 박혀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나, 내 가족, 내 조직, 내 나라, 내 민족, 내 종교, 내 신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세울 것은 '너'가 아니라 '나'이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거나 위선자일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그러니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이익을 앞에 두고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너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칼날처럼 맞설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의문이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따라 살게 마련이니 이기적인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까? '이솝 우화'에 나오는 '말과 당나귀' 이야기가 떠오른다.


말과 당나귀가 한 주인 아래 있었다. 어느 날 주인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잔뜩 싣고 먼 길을 떠났다. 며칠이 지나자 기진맥진해진 당나귀는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게 됐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당나귀가 말에게 말했다.


"말아,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곧 죽고 말거야. 네가 내 짐을 조금만 덜어 줄 수 없겠니?"


이에 말은 버럭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염치없는 당나귀야,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네 짐까지 짊어지라고?"


"조금만."


"싫어!"



말은 냉정했다. 어쩔 수 없이 당나귀는 사력을 다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못해 쓰러졌고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자 주인은 당나귀가 짊어졌던 짐 전부를 말에 실었다. 네 다리가 모두 후들거릴 정도로 많은 짐을 짊어진 말은 그제야 후회했다.


"당나귀 부탁대로 짐을 조금만 덜어 주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이게 무슨 꼴이람."


이 우화를 통해 이솝이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유치원생이라도 알만큼 뻔하다. 서로 도와 함께 사는 공존의 지혜를 갖자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당나귀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자신의 힘겨움을 덜고자 한다. 그에 대해 누가 감히 나무랄 수 있겠는가. 말의 이기적인 유전자 역시 자신의 힘겨움을 덜고자 한다. 그에 대해 또 누가 오만하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물론 지나치게 말의 입장만 내세워서 혹은 당나귀의 입장만 앞세워서 자기의 이익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도 있다.


말의 입장만 내세우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당나귀는 힘이 약해 죽은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약한 자가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 약한 자 때문에 내가 더 힘들어진 것이 불만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부류의 대표로는 나치의 우두머리 히틀러가 손꼽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약자를 누른 강자가 세계를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게르만 민족이 강자라고 하면서 약자라고 제멋대로 단정한 유태인 학살에 나섰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그토록 혹독하게 당했던 이스라엘이 지금은 레바논에서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당나귀의 입장만 앞세우는 이들은 말할 것이다. 말이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강한 자는 매정하다! 그 강한 자 때문에 죽게 된 것이 원통할 뿐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는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우리 사회가 꼭 보호해야 할 이들이 있다. 20퍼센트쯤 되는 살기 어려운 계층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 가운데는 더러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도 있다. 스스로 별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 탓, 남 탓을 하거나 거지 근성 노예근성을 드러내는 이들이다.


어떻든 '이솝 우화'속의 그 말과 당나귀가 지닌 이기적인 유전자를 비난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비난의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그 둘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날카롭게 대립함으로 인해 당나귀는 죽고 홀로 남은 말은 더욱 고통스러워진 비극이 생겼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나는 협상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시혜나 폭력적인 방법 따위는 결코 그 답이 되지 못한다.


말에게 일방적인 시혜를 요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설사 말이 은혜를 베풀어 당나귀의 짐을 덜어 주었다고 하자. 얼마 가지 않아 말도 곧 지칠 것이다. 그러면 속으로 쌓이고 쌓인 불만이 폭발할 것이다. 시혜를 받은 당나귀 역시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떨까? 그 둘 모두에게 불행을 안겨 줄뿐이다.


폭력적인 방법도 절망적인 결과만 낳을 뿐이다. 그럴 힘도 없겠지만 당나귀가 폭력을 동원해 자기 짐을 말에게 짊어지게 했다고 하자. 힘들어진 말은 가만히 있겠는가? 말도 곧 폭력을 사용할 생각을 할 것이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는 신호등이다.


말과 당나귀에게 남은 선택은 협상뿐이다. 다른 그 무엇이 있겠는가? 협상의 사전적 의미는 '협의에 의해 어떤 목적에 부합된 결정을 하는 일'이다. 말과 당나귀의 목적은 그 누가 죽지도 않고, 그 누가 둘의 짐을 홀로 다 감당하지도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과 당나귀는 먼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서로 돕지 않으면 비극이 온다는 자각 말이다. 그런 후에 협상을 통해 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다. 당나귀가 힘들 때는 말이 짐을 덜어 주고, 가벼운 짐으로 원기를 회복한 당나귀는 다시 지친 말의 짐을 덜어 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 방법을 찾지 못하면 결과는 우화처럼 비극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대립하는 여러 주체들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사회적인 대타협을 이룬 네덜란드의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덜란드의 국토는 바다보다 낮다. 그래서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나라를 건설했다. 만약 제방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국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노동자와 사용자, 권력자와 서민, 남자와 여자 등을 가릴 것 없이 제방 앞에서 국민 모두가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의식이 그들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로 노사 관계만 보더라도 공존의 모델로 전 세계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공존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그러한 위기의식이 없는 것일까? 그래서 대립하는 여러 주체들이 서로 협상할 의지가 없는 것일까? 그래서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너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폭력과 폭력이 맞붙어, 시위에 나선 노동자의 죽음 같은 불행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너무도 멀다. 오해하지 마시라. 공연히 우리에게 있지도 않은 제방을 내세우며 위기의식을 조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눈을 뜨고 우리 주위를 보자. 날선 대립들이 섬뜩할 정도가 아닌가? 공존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공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지뢰밭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너무도 많이 깔려 있다.


그렇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위기에 빠져 있지 않은가? 위기의 현실을 똑바로 본다면, 제로섬으로 머릿속이 채워진 전사들은 목소리를 낮추어라. 지금은 공존을 위해 협상을 할 때이다.


글/배일도 의원(한나라당,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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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6-08-07 16: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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