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신라 해상기지 청해진 주성 ‘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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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신라 해상기지 청해진 주성 ‘장도’ 남도 문화·낭만 따라 걷는 ‘남파랑길(9)’   
  • 기사등록 2025-04-20 08:00:01
  • 기사수정 2025-04-20 14: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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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발길은 ‘장도청해진유적(將島淸海鎭遺蹟)’을 보기 위해 도보전용 나무다리(청해진교)를 건너 장도로 들어간다. 

 

청해진교.

삼국사기(三國史記) 흥덕왕기에 의하면 828년 4월에 장보고가 중국에서 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명을 동원해 지금의 완도에 해상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했다. 이 청해진은 현재 완도 장도에 위치한다. 일정한 간격을 둔 높이 30~40cm되는 목책 밑 부분을 방사성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840년으로 나와 이 장도가 청해진으로서 주성이며, 군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해진 전경.

청해진의 설치된 이유는 중국의 도처에서 신라인이 붙잡혀가 노예가 됨은 물론 해적행위가 막심해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진을 설치했다. 장도는 야산으로 이뤄진 작은 섬이다. 육지에서 170m 떨어져 있다. 간조 때 육지와 연결되며, 만조 때 수심이 1.5∼2m 정도다. 장보고는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가진 호족으로 성장했고, 이를 배경으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청해진 우물.

청해진유적지 입구에 도착하면 우선 외성문과 우물이 보인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에 가장 필수적이다. 

 

판축.

우물은 ‘ㄷ’자형 판축유구(版築遺構)로 된 독특한 시설로 우물과 외성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우물의 수면까지 깊이는 5.8m다. 주름무늬병과 철제편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청해진유적지의 성(城)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된 판축토성(土城)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길이 890m다. 성벽은 양쪽으로 판자 틀로 기단들을 만들어 깔고, 그 안쪽으로 흙과 모래를 번갈아 넣어 단단하게 다져 쌓아 올린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굴립주.

청해진 성 정상부에는 땅을 파서 박아세운 기둥인 건물의 굴립주(堀立住)가 위치한다. 

 

청해진 토성.

청해진 고대.

청해진 성의 남쪽 성벽의 높은 지점에는 ‘고대(高臺)’가 위치하고 있다. 이 고대는 관측소(觀測所) 역할을 했던 건물로 추정되며, 성의 바깥쪽과 안쪽, 마을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건물은 앞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다. 건물을 지은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으며, 지붕은 날렵한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당집.

고대에서 성을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섬의 정상부근에무형문화재(1995년)인 ‘완도 장좌리 당제와 당굿’을 하는 당집이 있다. 이 당굿은 매년 정월 대보름 일출 무렵에 마을주민 모두가 참여해 장도(將島)의 당집에서 지내는 당제(堂祭)와 당굿이다. 당집 안에는 주신(主神)인 송징장군(宋徵將軍)을 중심으로 우측은 정년장군(鄭年將軍), 좌측은 혜일대사(慧日大師)를 모시다가, 1982년부터는 새로 장보고를 추가해 모신다. 

 

장보고 동상.

청해진 출입문.

우리 속담에 ‘염장 지르다’라는 말이 있다. 845년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보내려 했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섬사람(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청해진에서 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846년(문성왕 8) 문성왕은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장보고를 살해했다. 851년(문성왕 13)에는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염장이 칼을 지르는 바람에 해상왕국의 영화가 안타깝게 무너진 것을 빗댄 말이다. 

 

장군샘.

다시 장좌리로 나와 북쪽 해안으로 올라오면 장군샘과 마을 당산목인 느티나무가 있다. 장군샘은 828년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 마을주민과 병사가족들의 식수와 빨래터로 사용한 샘이다. 보호수로 지정(1982년)된 느티나무는 수령 520년으로 나무 높이가 20m이다. 나무둘레가 약7m 정도이며 나무주변으로 금줄이 둘러쳐진 것으로 보아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 같다. 

 

당산목인 느티나무.

장좌리를 지나면 완도읍 대야리다. 대야리(大也里)는 용이 살았다는 용소(용둠벙)가 있다. 신라후기시대에 청해진의 공공기관이 있었던 곳으로 ‘청비리’라고 했다. 마을을 관통하는 하천에 비가 오나 가뭄이 드나 항상 맑은 물이 끊이지 않아 대수라 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대야리로 이름이 바뀐다. 

 

대야리 농공단지.

옛날에는 해남 강진사람들도 이용했던 장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지금도 ‘장터’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청해진권역도농교류센터와 식품가공업체가 들어섰다. 

 

대야리 해변길.

대야리 해안을 따라 너덜 길을 지나면 완도군 군외면 영풍리(永豊里)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던 전라감사가 산 좋고 물 좋은 이 들녘의 뒷산에 치수해 버려진 땅을 개간하면 영원히 아름다고 풍요로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하여 ‘영풍’이라고 부른 이름이 지금까지 이른다. 

 

비파나무.

영풍리 대창2구 마을회관 앞에는 열매를 식용하고, 잎을 진해(鎭咳)·건위(健胃)·이뇨(利尿)에 사용하는 비파(枇杷)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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