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천주교 아픔 간직한 ‘해미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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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천주교 아픔 간직한 ‘해미읍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54)  
  • 기사등록 2025-01-18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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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충남 서산시 해미읍에는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전북 고창읍성,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보존이 잘 돼 사적(제116호)으로 지정된 해미읍성(海美邑城)이 있다. 

 

해미읍성 지도.

‘해미(海美)’라는 이름은 1406년(태종 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 두 현을 병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1413년(태종 14)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1491년(성종 22)에 성벽이 완성됐다. 병영이 1652년(효종 3)에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다. 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그 모습을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甕城)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다고 적고 있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 있다고 해서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이라고도 했다. 지금은 성 밖에서는 탱자나무를 볼 수 없고 안쪽에만 길게 심어있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 길이가 1.8㎞,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쯤 된다.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려 있어 쭉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린다. 

 

해미읍성 진남문.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루(남문)는 잘 보전돼 있다. 홍예를 올려 문을 만들고, 그 위에 3칸 2층 누각을 세웠다. 해미읍성이 평야 지역에 있어서 진남루에만 올라도 주위의 모습이 다 들어온다. 옹성이 딸린 진남루 앞쪽으로 돌아 나와 살펴보면 석수장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진남문 문루 글씨.(황명홍치4년신해조)

문루의 대석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1491년(성종 22)년에 해당한다. 해미읍성이 그 해에 완공됐음을 말해준다.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복원한 것이고 본래 북문은 없었다. 

 

해미읍성 중앙통로.

해미읍성 무기전시.

신기전기화차.

진남루 아래 문을 통해 들어가면 길 우측으로는 신기전기화차와 검차, 각종 포들이 진열돼 있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는 1451년(문종 1)에 만들어졌다. 신기전 100발을 장전한 후 이를 동시 또는 연발(連發)할 수 있는 일종의 다연장(多連裝) 로켓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뒀다. 이곳에 있는 신기전기화차는 제작당시의 설계도가 남아 있는 병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검차.

검차(劍車)는 수레의 전면에 설치된 방패에 검을 꽂아 만든 무기로 고려시대부터 사용됐다. 검차는 평지에서 4명의 병력이 운용했다. 수레 맨 앞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꽂아 공격했고, 검차의 전면에는 짐승 얼굴 모양의 방패를 세 겹으로 설치해 적의 공격을 막도록 했다. 외면에는 귀면(鬼面) 상을 그려 넣어 적의 말을 놀라게 했다. 이 귀면상은 2002년 서울월드컵대회 때 붉은악마 깃발에 새겨진 치우천왕(蚩尤天王) 화상이다.

 

해미읍성 회화나무.

바로 옆에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충청남도 기념물(제172호)로 지정됐다. 이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뒀던 감옥이 있었다.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에 폭풍으로 부러졌다.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해 보호·관리되고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도 방문했다. 

 

해미읍성 호서좌영.

진남문에서 가운데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동헌(東軒)이 나오는데, 정문인 누각은 ‘호서좌영(湖西左營)’ 편액이 걸려있다. 해미에 있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이설한 후 해미읍성에는 충청도의 5개 병영 중 하나였던 호서좌영을 설치하고, 호서좌영장을 겸직한 해미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원래 ‘읍해루(揖海樓)’라고 했으나, 1970년대에 복원한 후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아래층 3칸에 문이 달려 있고, 위층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해미읍성 동헌.

동헌 회의 모습.

해미읍성 안의 관아 자리에는 동헌과 내아와 객사를 복원해 놓았다. 동헌(東軒)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해미읍성 내아.

동헌 좌측에 있는 내아(內衙)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官舍)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내아는 살림집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고증과 발굴조사를 통해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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