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서원 철폐에도 무사했던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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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서원 철폐에도 무사했던 ‘필암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43)  
  • 기사등록 2024-12-08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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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이다.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 梁子徵, 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하서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1590년(선조 23)에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필암(筆巖)’은 고향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따왔다. 바위에는 윤봉구의 글씨로 ‘筆巖(필암)’이 각자돼 있다. 

 

필암서원 홍살문과 확연루.

필암서원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1624년(인조 2)에 김인후가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1662년(현종 3)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현종(顯宗)께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서원으로 승격됐다. 당시 서원이 있던 곳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1672년(현종 13)에 다시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기고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巖里)’라고 했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필암서원 확연루.

필암서원은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앞쪽에, 제사 지내는 제향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조선시대 서원의 전통양식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다. 휴식처이자 정문인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원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인 진덕재와 서재인 숭의재가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인 우동사를 배치했다. 특이한 것은 다른 서원들은 보통 강학 공간 앞에 기숙사를 만드는데, 이곳은 강학 공간 뒤에 있다. 

 

필암서원 하마석.

서원 바깥에 선 홍살문과 묵은 은행나무는 이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린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서원의 출입구가 되는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다. 바깥쪽으로는 아래·위층 모두 활짝 열 수 있는 널문이 달렸다. 안쪽은 트이고, 2층에 마루가 깔렸다. 측면에는 바깥쪽 두 칸씩에 널문이 달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 있다. 이곳은 서원의 정문이면서 동시에 원생들의 휴식처다. 

 

‘확연(樓然)’은 ‘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했다.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때로는 여러 선비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기도 했을 2층 누마루의 난간 받침은 위쪽이 살짝 뒤집힌 연잎 모양으로 조촐하게 멋을 냈다. 널문을 닫아 놓으면 안팎이 차단되지만, 열면 그대로 시원스레 안팎이 연결되는 조선 건축의 묘미를 볼 수 있다. 정면에 나붙은 편액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글씨다. 

 

필암서원 청절당.

필암서원과 청절당 글씨.

확연루와 마당을 지나 곧바로 닿게 되는 것은 청절당(淸節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 건물이다. 조선의 학자 윤봉구(尹鳳九)가 쓴 筆巖書院(필암서원)이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으며, 마루 위에는 조선의 문신이자 명필인 송준길(宋浚吉)이 쓴 淸節堂(청절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인데 들어 여는 문이 달려 있고, 양옆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원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서원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진원현(珍原縣)의 객사 건물이었던 것을 1672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필암서원 진덕재(동재).

필암서원 숭의재(서재).

청절당을 지나 더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인 우동사로 향하는 내삼문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 원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가 있다. 기숙사는 강당과 더불어 서원 교육 기능의 핵심을 이룬다. 보통은 기숙사가 먼저 있고 더 들어가서 강당이 있는데, 이곳 필암서원은 기숙사가 안쪽에 배치돼 있다. 들어가면서 오른쪽에 있는 것은 동재, 왼쪽은 서재라 한다. 원생 가운데 선배들은 동재, 후배들은 서재에 기거했다. 필암서원 동재와 서재에는 역시 송준길의 글씨로 進德齋(진덕재)와 崇義齋(숭의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진덕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규모로 길쭉하고, 평활한 형태다. 전면에는 툇마루가 깔려 있다. 마루면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변화해 모종의 위계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 양끝 방 쪽의 툇마루가 가운데 대청 부분보다는 높게 되어 기능의 위계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숭의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규모다. 길쭉하고 평활한 형태다. 전면에는 툇마루가 깔려 있고, 마루면의 높낮이가 미세하게 변화해 모종의 위계를 나타낸다. 

 

필암서원 경장각.

청절당 앞에는 ‘경장각(敬藏閣)’ 건물이 있다. 1796년(정조 20)에 하서 김인후를 문묘(文廟)에 종사하면서 정조(正祖)가 내려보낸 내탕금으로 세워졌다. 이곳에는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 하사한 ‘묵죽도’의 판각(板刻)을 보관하고 있다. 이 묵죽도(墨竹圖)는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節義)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됐다. 건물의 모서리에 용머리와 국화문(菊花紋)을 조각한 것도 어제(御製) ‘묵죽(墨竹)’을 보관하기 때문이라 한다. 편액은 정조의 어필(御筆)로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을 설치했다. 

 

필암서원 우동사.

경장각(敬藏閣)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우동사(祐東祠)’가 있다. 이곳에는 하서(河西) 김인후의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돼 있으며, 좌측면에는 양자징이 종향(從享)되어 있다. ‘우동(祐東)’의 의미는 송시열의 ‘신도비명’에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도와(祐) 하서(河西) 김선생을 종생(鍾生)하게 하였다”의 뜻이다.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집자했다. 봉행(奉行)은 하서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열린다. 

 

필암서원 내삼문과 계생비.

진덕재 앞에는 ‘계생비’가 있다. 계생비(繫牲碑)는 춘추 향사(享事)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메어 놓는 비석이다. 제관들은 메어 놓은 가축들을 검사한 후 제물로 적합한지 여부를 결정했다. 비석 앞면 글씨 ‘필암서원계생비’는 송재 송일중이 썼다. 이 비는 ‘묘정비(廟庭碑)’도 겸(兼)하고 있다. 뒷면에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 등이 기록하는 비석으로 서원비(書院碑)라고도 한다. 비문은 송병선(宋秉璿)이 찬하고 글씨는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필암서원 유물전시관인 원진각(元眞閣)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하서 김인후는 조선 초에 일어났던 왕자의 난을 피해서 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숨어들어온 울산김씨(蔚山金氏)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던 그는 10세 때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고, 1513년에 성균관에 입학해 이황(李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셔진 나라의 18현인 중 전라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속해 있어 전라도, 특히 장성 사람들에게 큰 긍지를 갖게 하는 인물이다. 

 

필암서원 정조어필 경장각.

홍문관 부수찬을 지내는 등 벼슬길에 나가기도 했으나,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와 성리학을 연구하며, 평생을 보냈다. 학문에서는 특히 성(誠)과 경(敬)을 중히 여겼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등 태극도설(太極圖說)에도 조예가 깊었다. 당시 그의 집 앞은 인근 여러 고을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선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그 중 송강 정철(松江 鄭澈)도 있었다고 한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필암서원 원진각(유물전시관).

자연의 섭리 속에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자연에 비유해 노래한 김인후의 모습이 절로 보인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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