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이언적 덕행 기리는 ‘경주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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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이언적 덕행 기리는 ‘경주 옥산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13)  
  • 기사등록 2024-08-25 08: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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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둘러보고 경주 옥산서원으로 달린다. 

 

옥산서원 입구.

조선조 명문 사립교육기관인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배향한 곳이다. 이 서원은 경주시 안강읍에 자계천이 흐르고 숲과 계곡이 어우러지는 풍광 좋은 자리에 위치한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이 있는 곳까지 회재의 학문과 열정이 스며들어 성현의 문화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옥산서원 배치도.

옥산서원은 사적(제154호)으로 지정됐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572년(선조 5)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했다. 이언적(李彦迪)은 중종(中宗) 때 문신으로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의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明宗)의 공신으로 배향됐다. 1574년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됐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옥산서원 역락문.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역락(亦樂)’은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 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에서 따온 이름 같다. 출세가 목적이거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성숙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먼 곳에서도 사람이 찾아온다는 뜻 같다. 

 

옥산서원 무변루.

역락문으로 들어서면 무변루가 나온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처음 이름은 남창루였으나, 노수신(盧守愼)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며 북송(北宋)의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유학자이자 문학가인 주돈이(周敦頤)의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와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는 총 7칸으로 구성된 규모가 큰 2층 누각이지만, 구인당 쪽에서 바라보면 5칸 건물로 자연을 향해 열린 구조라기보다는 내부를 응시하는 형태다. 

 

옥산서원.

무변루와 마당을 지나면 옥산서원의 중심건물인 구인당이다. 구인당(求仁堂)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求仁錄)’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편액도 한석봉이 썼는데, 1838년(헌종 4) 화제로 소실됐다가 이듬해 다시 지었다. 이곳에서 강의와 토론이 열렸다. 마루 양쪽에 있는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전면에 걸려 있는 당시 사액 글씨 ‘玉山書院(옥산서원)’은 이산해(李山海)가 썼다. 1574년 5월에 편액을 걸었으나, 현재 걸려 있는 사액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것이다. 

 

옥산서원 암수재.

옥산서원 민구재.

옥산서원 체인묘 내삼문.

구인당 앞마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학문을 닦던 동재(東齋)인 민구재(敏求齋)와 서재(西齋)인 암수재(闇修齋)가 마주 보고 있다.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은 동재에 기거했다. 구인당 뒤쪽으로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이 있고, 체인문(體仁門)을 둘러싼 담장 안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와 제기실이 자리 잡고 있고, 신도비도 함께 있다. 이곳도 일반서원처럼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를 하고 있다. 

 

옥산서원 구인당에서.

마침 서재인 암수재(闇修齋)에서 유생복(儒生服)으로 갈아입고 잠시 유생의 신분이 되어 본다. 구인당으로 나가 훈장으로부터 옥산서원과 회재 선생에 대한 내력을 설명 듣고는 동재인 민구재(敏求齋)로 가서 붓을 들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흉내를 내보았으나, 마음만 앞설 뿐 제대로 되지 않는다. 글씨는 정심(正心)이 중요한 것을…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하다’, 암수재(闇修齋)는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수양하다’라는 뜻이 있다. 

 

옥산서원유물관.

옥산서원에는 보물급 문화재가 많다. 회재가 벼슬살이하며 받은 교지, 독락당과 강계에 유배 중이던 시기에 저술한 책 등이다. 국보인 ‘삼국사기’ 본질 9책 50권이 옥산서원유물관에 있지만, 열람이 불가능하다. 또 ‘동국이상국전집’을 비롯한 고서 4000여 권, 호구단자와 명문, 도록 등 고문서 1156건, ‘회재선생문집’ 책판 1123판 등 무형 유산과 기록 유산 6300여 점이 있다. 

 

세심대.

옥산서원 앞으로는 자옥산 골짜기를 휘감는 자계천(紫溪川)이 흐르는데 그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세심대(洗心臺)’라고 부른다.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만든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독락당(獨樂堂)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며, 그 중 하나가 세심대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고, 바위에 새긴 글씨는 퇴계 이황(李滉)이 썼다. 

 

이언적의 본관은 여강(驪江)이고, 호는 회재(晦齋)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1491년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 사간원 사간에 임명됐는데, 김안로(金安老)의 재 등용을 반대하다가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했다. 

 

독락당 솟을대문.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은 회재가 41세에 이곳으로 낙향해 처음에는 계정(溪亭) 자리에 3칸의 띳집을 지었으나, 뒤에 정혜사(淨慧寺) 주지의 주선으로 띳집을 헐고 계정과 양진암(養眞菴)과 독락당을 연달아 지었다. 독락당(獨樂堂)은 “어진 선비도 세속의 일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이후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던 중 7년 만에 재 등용돼 좌찬성 벼슬까지 올랐으나, 을사사화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유배생활 중에 1553년 63세의 나이로 마감했다. 독락당을 매우 아껴 유배지에서도 이 집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독락당 토담.

독락당은 안채와 사랑채, 별당, 사당, 공수간 등을 갖춘 살림집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회재의 옥산파 17세 종손 부부가 생활한다. 독락당의 특징은 독락당 옆쪽 담장에 살창을 달아 대청에서 냇가를 바라보도록 한 것이다. 세속에 지친 마음에 위안을 주는 푸른 숲과 맑은 계곡을 품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존중하며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자 한 회재의 노력과 의지가 담겨있다. 

 

독락당 경청재.

독락당 안에는 ‘경청재(敬淸齋)’가 있다. 이 고택(古宅)은 1601년(선조 34)에 이언적의 손자 준(浚)과 순(淳) 두 형제가 1538년(중종 33) 청백리에 가자(加資)된 회재의 옥산별업(玉山別業)을 봉수(奉守)하기 위해 화의문(和議文)을 작성하면서 ‘청백(淸白)은 공경지심(恭敬之心)에서 나온다’고 하여 후손들이 이 집 당호를 경청재라고 했다. 화의문(和議文)은 ‘계정(溪亭)과 독락당을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연했는데, 후손들 가운데 혹 궁벽해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불효로서 논단할 것’이라고 했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지나 독락당(獨樂堂)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있다. 정혜사지 일대의 경작지에는 기왓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과거 정혜사의 중심을 이뤘던 사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십삼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를 보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1962년에 국보(제40호)로 지정됐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이 석탑은 1922년경 일본인들에 의해 수리된 것이라 하는데 보수공사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탑신부 위층의 3층이 떨어져 있던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았으며, 기단을 시멘트로 굳혀 놓았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정혜사 터에 남은 9세기 신라후기 석탑으로, 높이 5.9m에 이른다.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석탑(異形石塔)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조형미가 빼어나 볼수록 신비롭고, 예술적인 감동을 준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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