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서애 류성룡 배향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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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서애 류성룡 배향 ‘병산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서원을 따라(12)  
  • 기사등록 2024-08-24 09:49:51
  • 기사수정 2024-08-24 13:5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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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화산 자락 남향으로 자리 잡은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고, 7년의 전란을 눈물과 회한으로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병산서원 전경.

병산서원의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이다.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서애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천 여 점이 보관돼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 장판각.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해 사묘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향사(享祀)하면서 서원이 됐다. ‘屛山書院(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다.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다. 병산서원도 전학후묘(前學後廟)로 구성돼 있다. 

 

병산서원 존덕사 내삼문.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 한국서원 건물의 으뜸으로 알려진 병산서원 정문은 복례문(復禮門)이다. 

 

병산서원 복례문.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갈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돼 있다.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하는 것은 ‘마음과 몸을 다시 한 번 겸손하게 하라’는 의미 같다. 

 

병산서원 광영지.

복례문으로 들어가면 ‘광영지(光影池)’라는 아주 작은 연못이 하나 나온다. 이곳은 선비들이 마음을 닦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광영은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 중에서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라는 구절에서 인용했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뜻으로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이자 세계관을 나타낸다. 

 

병산서원.

병산서원 입교당.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입교(立敎)는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입교당은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다.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정면)

병산서원 만대루.(측면)

병산서원의 백미는 복례문과 입교당 사이에 있는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대루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晩對樓)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왔다고 하며 “푸르른 절벽은 오후 ‘늦게까지 오래도록’ 대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출입이 막아 놓아 만대루에 올라갈 수 없지만, 앞의 병산(屛山)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달팽이 모양의 뒷간.

서원을 돌아보고 측문으로 나오는데 달팽이 모양의 뒷간이 나온다. 이곳은 유생(儒生)들을 돕는 일꾼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이다. 문도 없고 지붕도 없이 돌담으로 둥글게 감아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달팽이와 같을 정도다. 담장 한쪽 끝이 다른 쪽 끝에 가리기 때문에 문이 없어도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독특한 구조다. 이 뒷간은 사원이 처음 세워진 17세기 초에 지어졌고, 2003년에 보수했다. 병산서원의 부속 건물에 포함돼 1977년 사적(제260호)으로 지정됐다. 

 


병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공부하던 유생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며 거닐던 곳이었으리라. 시인 안도현(安度眩)은 그의 시 ‘낙동강’에서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어느 날의 선열처럼 뜨겁게”라고 읊었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그냥 뜨겁게 우러나오는 선열이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라고 하고 싶다. 낙동강을 흐르는 물은 차가운 육신을 덥히는 뜨거운 피다. 

 

병산서원 앞 배롱나무.

그 낙동강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내 마음 띄워 보낸다. 짙게 채색되는 자연 속을 해치며 나무들과 눈 맞추고, 오래 보면 더 예쁜 배롱나무꽃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병산서원을 오갔던 선비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였을까?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강바람에 휘파람을 날리며 화산자락을 벗어나면 가을자락으로 막 접어들어 배롱나무 꽃잎 마지막 떨어질 때 벼들은 잘 영글어 고개를 숙인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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