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삼봉 정도전 유배지 나주 ‘백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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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삼봉 정도전 유배지 나주 ‘백동마을’ 영산강 물길 따라(16)
  • 기사등록 2023-08-27 08:39:59
  • 기사수정 2023-12-24 19: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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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영모정에서 삼봉 정도전 유배지를 찾아 나주시 다시면 ‘백동마을’까지 자동차로 이동한다. 마을 입구에는 <白龍山下 白洞마을(백룡산하 백동마을)>라고 글을 새긴 선돌이 눈길을 끈다. 보통 마을 표지석에는 마을 이름만 표기하는데 마을 뒷산인 백룡산 아래라는 뜻의 ‘白龍山下’를 표기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백룡산하 백동마을.


조선 건국의 핵심 주역인 정도전이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이 백룡산 아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배지는 여기서부터 0.9㎞ 떨어져 있다.


백룡산(白龍山, 347m)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과 문평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과거 기우제를 올리던 제단자리에 헬기장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북동쪽으로 내려서면 용굴이 나오며, 영정굴 앞까지 땅속으로 물길이 나 있다고 전한다. 남쪽에는 치마, 줄바우와 연소혈(燕巢穴) 명당이, 남동쪽 기슭 백동마을 어귀에 관바우가 서있다. 대오개 안고랑에는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사(消災寺)터가 있다. 이곳을 풍수지리상 와혈(窩穴)로 소쿠리 속 같이 오목하게 들어간 형상으로 ‘소쿠리 명당’이라 한다.


친명파였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당시 실세였던 친원파 이인임(李仁任, ?∼1388)이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라는 영접사 직을 거역하자 유배를 보냈던 백동마을은 1375년(고려 우왕1) 회진현(會津縣) 소재동(消災洞)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속하는 촌락(村落)이었다. 그 당시에는 부곡(部曲)은 ‘천민들의 집단취락’으로 인식돼왔지만, 이곳 백성들은 ‘개방적인 자연 촌락’으로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재동은 농사를 생업으로 삼던 양민들과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 초가.


1377년(고려 우왕3) 정도전은 3년의 유배생활을 이곳에서 마친 후 서울(당시 개경)을 제외하고는 원하는 곳에 살게 하는 종편거처(從便居處)로 고향인 영주로 갔지만,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 끝에 한양의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삼봉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삼봉재를 헐어버리고 핍박하자 거처를 다시 부평으로 옮겼으나, 다시 헐어버리자 김포로 옮겨 살다가 유배가 끝나는 1383년 이성계를 만나러 함길도 함주로 간다. 정도전의 유배생활은 총 9년이었지만, 거평부곡의 3년은 정도전의 인생을 바꿔 놓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정도전은 소재동에 유배된 3년 동안 그의 정치철학에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정치의 싹을 틔우게 된다. 도올 김용옥은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했다. 촌로의 이러한 발언은 정도전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 충분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도전은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와서 처음에는 황연(黃延)의 집에 거처했다. 정도전은 소재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권문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현실, 그러면서도 강하고 낙천적이고 지혜로운 백성들을 보고 배웠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정치는 왕이 아닌 현명한 신하들이 주도해야 한다. 고려는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는 지경이니 혁명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길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삼봉의 혁명적인 민본사상은 소재동에서 발효되고 숙성됐다.


                               ▲유배지 정도전의 시.


삼봉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나주정씨세장산(羅州鄭氏世葬山)>비가 서 있다. 그러고 보니 백룡산자락이 나주정씨 문중 땅으로 대대로 조상의 얼이 묻힌 곳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봉화정씨다.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이후 나주시와 봉화정씨 문중에서 정도전의 유배지를 찾아 조성에 나섰는데, 유배지 터가 나주정씨 소유였다. 이에 나주정씨 문중은 비록 본관은 다르지만 삼봉 유배지 터 200여 평을 봉화정씨 문중에게 영구무상임대했으며, 이에 봉화정씨는 그 땅에 나주정씨 가문의 정식(鄭軾)장군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인가? 해는 석양에 기우는데 갈 길은 멀어 서둘러 백룡저수지로 나온다. 농업용수로 이용되는 백룡저수지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나주 지역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구로스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다시면에 축조한 저수지로 백룡산(白龍山)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유역면적 2730ha, 수혜면적 120.5ha, 만수면적 56.1ha, 유효 저수량 315만t, 길이 226m, 높이 16.2m다. 저수지 안에는 고조선의 유물로 추정되는 고인돌 20여 기가 수몰돼 있다고 한다.


영산강 두 번째 기행을 마감하면서 나주 땅을 되새겨 본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에서 오씨부인을 만나 후백제 견훤의 해양진출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삼봉 정도전은 3년간 나주 소재동 거평부곡의 귀향생활이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되는 민본사상을 깨닫는 동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어찌됐던 고려와 조선 건국의 단초가 이곳 나주 땅이라고 생각하면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인간사회는 물욕 때문에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며 병행할 수 없으므로 별도의 통치자가 필요하며, 그래서 백성은 세금을 내고 통치자를 부양하는 것이다. 이때 통치자는 백성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만큼 마땅히 백성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정도전의 말을 지금의 시각에서도 새겨볼 만하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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