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사고(史庫) 보관 적상산 ‘실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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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사고(史庫) 보관 적상산 ‘실록전’ 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4)
  • 기사등록 2023-03-11 07:52:49
  • 기사수정 2023-12-23 08: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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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금강 천리 길을 걷기 위해 무주군 부남면으로 가기 전에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을 따라 적상산을 둘러보러 간다.


                                 ▲적상산 원경.


덕유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적상산(1034m)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것이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모습과 같다고 해서 ‘적상산(赤裳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한국 100경 중 하나로 꼽힌다.


산 자체로 아름다운 적상산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적상산은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1614년(광해군 6)에 설치된 적상산 사고(史庫) 때문이다. 전주에 보관 중이던 사고가 임진왜란 때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가 전소되자, 선조가 실록 3부를 더 인쇄해 전주본 원본과 교정 인쇄본을 합쳐 실록 5부를 만들어 춘추관(春秋館), 강화 마니산(摩尼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 묘향산(妙香山) 등에 각각 1부씩 나눠 보관했다. 광해군 6년에는 실록전을 적상산에 건립한 뒤 일부를 옮겨 보관했고, 인조 때 묘향산 사고 전부 옮겨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됐다.


                                       ▲적상산성.


이와 관련해 건립연대는 서로 다르나 적상산성은 고려 때 최영(崔瑩)이 건의해 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조선 세종 때 최윤덕(崔潤德)도 건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가지 종합해 볼 때 고려 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의 높이는 보통사람 키의 가슴 정도이나, 산세가 워낙 험해 밖에서 넘어오기는 무척 힘들어 사고를 지키는 중요한 방어막이 됐다.


안국사(安國寺)도 1277년(고려충렬왕 3)에 월인(月印)이 지었다고 하나, 조선 태조 때 자초(自超)가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지었다고도 전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들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으며, 호국사(護國寺)와 함께 적상산 사고의 수호사찰로의 역할을 해왔다.



                            ▲적상산 서고 실록각.


고종 9년(1872년)에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나, 1910년 조선의 주권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해 오다가 끈으로 맨 책들이 흩어져 훼손이 발생했고, 한국전쟁 때 분실됐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선원각은 안국사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온다.


지금의 사고와 안국사는 1990년대 적상산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수몰돼 옮겼다. 안국사는 1949년에 불타 없어진 호국사 터로 이전했다고 하며, 적상산 사고도 현재의 자리에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는 선원각과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 두 채의 큰 서고로 지었다.


조선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산정호수인 적상호(赤裳湖)와 전망대를 뒤로하고 서둘러 무주군 부남면으로 이동해 상굴교를 지나 굴암로를 따라 ‘연어가 물살을 거스르고 상류로 올라가듯’ 가파른 산과 절벽에 길을 내어 만든 무주의 금강 벼룻길을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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