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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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천강홍의장군’ 곽재우 장군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32)
  • 기사등록 2023-01-01 08:53:05
  • 기사수정 2023-12-23 23: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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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강변 인근에 있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장군의 묘소를 찾아간다.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망우당 곽재우 가족묘원.


곽재우 장군 부친은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모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외가인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했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 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6월 1일이 현재의 ‘의병의 날’이다.


곽재우 장군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칭하면서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 입었다. 백마에 높이 앉아 아군과 적군에게 위엄을 보이고 위장전술로 적을 공격해 크게 승리했다. 장군이 이끄는 의병은 왜병의 진로를 차단해 호남진출을 차단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성주목사, 경상좌도방어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더 이상 다른 벼슬은 나아가지 않았으며, 1617년 눈을 감을 때 봉분을 돋우지 말고 평장(平葬)하라고 유언했다. 1709년(숙종35)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에 추증됐다.


                             ▲망우당 곽재우 봉분.


곽재우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마지막 제자이며 외손서(外孫壻)이다. 남명이 곽재우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외손녀의 배필로 직접 정했다고 한다. 남명은 퇴계와 함께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퇴계는 인(仁)을 중심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남명은 의(義)를 중심으로 훈육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실천하는 양심’으로 가르침을 받은 곽재우 정인홍(鄭仁弘, 1535∼1623) 등 남명의 제자 50여명은 들불 같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救國)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다시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포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를 연결하던 대암나루[대암진(臺岩津)] 자리에는 우곡교(牛谷橋)가 차지해 흔적도 없다. 구지면 대암리 새골마을을 지나 무심사(無心寺)로 접어드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면서도 고요가 깃든 길이다. 목탁에 맞춰 청아하게 흘러나오는 독경소리는 낙동강 벼랑에 맑게 흩어진다. 무심사는 매주 토요일마다 ‘철야 정진 기도도량’으로 신도들의 발길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대구광역시 경계를 넘어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송곡리)로 들어선다.


무심사 입구에는 ‘숙식무료제공’이라는 푯말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지역민들과 화합·소통을 위해 우포늪 해맞이와 해넘이 행사에 매년 떡국 무료제공과 우포늪 보존 감시원들에게 의복과 신발을 무상으로 제공해 왔다. 이곳의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낙동강 절벽에 의탁한 절이지만 절경은 그만이다. KBS ‘TV문학관’에서 김원일의 소설 <바라암>을 촬영한 무대이기도 하다. 재 넘어 장천리에 도착하니 어둠이 저만큼 밀려온다.


한때 온천의 메카로 불리던 창녕군 부곡온천에서 숙면(熟眠)과 조반을 하고 숙소에서 가까운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만년교로 먼저 이동한다.


                                  ▲영산만년교.


보물 제564호(1972년3월2일 지정)인 ‘영산만년교(靈山萬年橋)’는 홍예교(虹霓橋)로 너비 3m, 길이 13.5m, 높이 5m이며, 1780년(정조4) 영산 남천(南川)에 가설된 다리다. 속칭 ‘만년교’라고 부른다. 남천 석교비(石橋碑)에 의하면 이 다리는 석수 백진기(白進己)가 축조했고, 그 후 1892년(고종 29)에 현감(縣監)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중수했다. 우리나라 수많은 보물 중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예는 아주 극히 드문 일이다.


만년교가 있는 곳은 ‘남산호국공원’이다. 영산은 임진왜란 때 현감 전제(全濟)장군이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서 충의용사들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이고, 3·1운동 때는 이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였다. 한국전쟁 때는 두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호국충절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에 조상들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자 충의용사들의 호국충혼탑을 건립했다.


만년교에서 가까운 곳에는 연지(硯池)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영산 고을 진산인 영축산이 불덩어리의 형상을 한 산으로 고을에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서 ‘불은 물로 다스린다’는 오행 사상에 의해 화재를 예방하고, 농사에 이로운 치수구로 벼루 모양으로 만들었다. 오랜 세월 가꾸지 않아 못의 구실을 못 하다가 1889년에 다시 파고 막아 개울물을 끌어들이고 하늘의 오성을 본 따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영산면에서 서쪽으로 약5㎞쯤 떨어진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昌寧支石墓)를 보기 위해 이동한다, 이곳에는 원래 7기의 지석묘가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돼 일명 ‘칠성바위’라고 불리고 있었으나, 1912년 도로공사 때 일본인이 일부 파괴·공사에 사용해 현재 1기만 남았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평지에 있는 고인돌과는 다른 입지조건을 보여주는 것으로 학술상 가치가 크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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