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쉽지 않은 ‘두루미’ 서식지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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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쉽지 않은 ‘두루미’ 서식지 보호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28)
  • 기사등록 2022-12-18 08:51:02
  • 기사수정 2023-12-24 08: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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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낙동강 고령군 쪽 강변에는 주민 숙원사업으로 ‘대가야역사문화공원’이 조성돼 있다. 대가야시대 유물과 문화를 모형물로 설치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 흥미와 역사성 고취에 기여하자는 취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낙동강 변에는 유독 공원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면 우선 이용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유지되어야 하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요되는 예산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파크골프장.


‘멸종위기종 흑·재두루미 도래지역’이라며 “소음과 불빛에 매우 민감하고 경계심이 많아 주의를 요한다”는 간판을 세워 놓고 여러 가지 제한행위를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는 ‘파크골프장’ 등 주민 운동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다산문화공원이 조성된 사문진교 아래로는 유람선이 여유롭다. 강둑에는 북미가 원산으로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된 가시박이 갈대숲을 잠식해 나간다. 그래도 개발제한구역 주민을 위해 국고보조금으로 조성된 ‘고령행복누리길’은 지친 우리들에게 산과 들, 강을 보면서 자연과 사람이 함께 호연지기(浩然之氣)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고령군 다사중학교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수변은 수초가 잘 발달돼 수생태계가 건전하게 보인다. 모 교회 앞에는 붉은 찔레꽃이 피었나 싶어 반갑게 사진을 찍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늦게 핀 장미다. 어디에 무슨 꽃이 피어 있던 모든 꽃은 참 곱다. 칡넝쿨은 너무 무성해 사람이 다녀야 할 길까지 뻗어 나온다.


                        ▲낙동강 수변에 버려진 크레인.


인도를 따라 고비를 살짝 넘어가는데, 왠 괴물이 칡넝쿨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다. 무슨 이유야 있겠지만 그 비싼 중장비(크레인)를 강변에 왜 버렸을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수준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럽다.


아침에 눈을 뜨니 제법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도 조반을 마치고 어제 도보를 마쳤던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지점에서 이어 걷는다. 월성리에는 대가야시대 토성 유적이 있는 곳이지만 비가 행동을 제약한다. 월성리를 지나 약1.5㎞쯤 지나면 다사면 송곡리로 당시 고령에서 유일하게 노론계 서원이었던 조선후기 노강서원이 나온다. 영남 사림(士林)들이 미워했던 우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이 있다는 자체가 의외다.


노강서원(老江書院)은 영조 때인 1692년 창건해 송시열(宋時烈)을 주향으로 하고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송환기(宋煥箕)를 배향하고 있다. 당시 고령에서 유일하게 노론계 서원이었던 노강서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성주군에 속했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 때 고령군으로 편입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됐다가, 1946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됐으며, 매년 음력3월 중정(中丁)일에 향사를 지낸다. 송시열이 거제로 귀향을 오갈 때 이곳을 거쳤다고 한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강변 성산별빛공원도 표지석만 확인하고 지나친다. 궂은날은 가끔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는데, 지금 막 길을 잃어버리고 길이 아닌 미끄럽고 질퍽한 둔덕을 넘어 들어가니 모 골재공장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다른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남의 공장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며 숨을 고른다.


                      ▲공사가 중지된 성채 모양의 건물.


다시 길을 재촉해 막 나서는데, 성채(城砦)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찾아갔으나 건물은 언제부터 공사를 시작했는지 좀 오래된 것 같고, 중앙문은 굳게 닫혀 있다. 무슨 기념관을 지으려고 시작했으나, 아직 마무리 못한 것 같다. 더 방치하면 흉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마당 옆에 큰 비석에는 ‘兵曹參判密城朴公大福戰績碑(병조참판밀성박공대복전적비)’라고 쓰여 있다.


박대복(朴大福, 1558∼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미 2천 석을 지원해 굶주리는 군사에게 제공했으며, 주둔해 있던 왜적을 대파해 시체가 낙동강 물을 막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37세의 나이로 전쟁터에서 순절했다. 비석에는 ‘병조참판’으로 기록돼 있으나 문헌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됐다고 나온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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