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임청각, 삼대 걸쳐 독립유공자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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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임청각, 삼대 걸쳐 독립유공자 배출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12)
  • 기사등록 2022-10-23 09:51:50
  • 기사수정 2023-12-24 17: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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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물가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아 데크를 타고 월영교로 향한다. 월영교(月映橋)는 안동댐 밑으로 상아동과 성곡동을 연결하는 길이 387m에 폭 3.6m의 목책 인도교다.


                                     ▲월영교.


다리의 명칭은 주민 공모를 통해 결정했으며, 안동 지역에 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안동댐 민속경관지에 월영대(月映臺)라고 적힌 바위글씨가 있어 월영교라고 했다.


월영교 아래로 황포돛배는 봄기운을 가르고 발길은 낙동강 따라 하류로 향한다. 간선도로인 석주로를 건너 철다리 밑으로 들어가자마자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七層塼塔)’이 나온다. 이 탑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국보 제16호로 높이 16.8m인 한국 최고 최대의 벽돌로 쌓은 신라 후기의 전탑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음 세김 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법흥사 절터는 칠층전탑 외에는 아무 흔적도 없으며, 현재는 고성이씨(固城李氏) 탑동파(塔洞派) 종택이다. 고성이씨는 본래 중국 당나라 때 난을 피해 들어온 이경·이황 형제를 시조로 한다. 고려 때 개경 송악산 밑에서 살았는데, 토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경상남도 고성 땅에 가서 살게 되어 ‘고성이씨’로 관향(貫鄕)을 얻었다.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 안동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게 됐다고 한다.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臨淸閣)은 1515년(중종10)에 형조좌랑을 지낸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한다.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돼 지금은 70여 칸만 남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의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의 생가다.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임청각 전경.


이 집은 용(用)자를 가로로 눕힌 것 같은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임청각의 사랑채인 군자정은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상태다.


임청각이란 뜻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깊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며, 당호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석주 이상룡은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강연회 등을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해 독판(督辦)으로 활약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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