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안동 청량산 가송협 자락 ‘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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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안동 청량산 가송협 자락 ‘고산정’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8)
  • 기사등록 2022-10-09 09:20:49
  • 기사수정 2023-12-24 17: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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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시발점테마공원부터 청량산 입구까지 9.1㎞는 봉화의 ‘예던길’로 명명됐다. 원래 예던길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숙부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면서 처음 걸었던 길로 녀던길, 예던길, 퇴계오솔길이 모두 같은 길이다. 그러나 봉화구간의 예던길은 퇴계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호수같이 조용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소용돌이치며 여울져 흐르는 물 위에 고무보트를 띄워 래프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강변을 따라 곳곳에 래프팅을 할 수 있는 시설들이 봄기운과 함께 기지개를 편다. 부산∼강릉을 연결하는 제35호국도도 낙동강을 따라 같이 흐른다. 그러나 흐르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거품은 바위에 부딪치며 생겼다 바로 사라지는 기포가 아닌 것 같다.


도로를 따라 호안 우측으로 걷다가 고계삼거리에서 명호교를 건너 좌측 오솔길로 접어든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문명산(文明山, 894m)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문명산은 남쪽으로 청량산(淸凉山, 870m)을 마주한다. 청량에는 문명의 예가 있어야 하므로 청량산이 있으면 문명산이 있어야 한다는 불교의 청량문명을 두고 각각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봉화 선유교.


낙동강 동쪽의 문명산과 서쪽의 만리산(792m)을 이어주는 출렁다리 봉화 선유교(仙遊橋)가 백용담 소(沼) 위에 설치돼 있다. 2016년에 준공된 이 다리는 길이 120m, 폭 2.5m, 높이 17m(하천 바닥부터) 규모로 세워진 현수교(懸垂橋)다. 백용담은 협곡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푸른빛을 띠며 유유자적한다. 정말 흰 용이 금방 물에서 솟아 나와 하늘로 오를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골이 깊은 문명산을 지나면 바로 청량산의 위용이 나타낸다.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淸凉山, 870m)은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외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금탑봉·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봉우리마다 어풍대·밀성대·풍형대·학소대·금가대·원효대·반야대·만월대·자비대·청풍대·송풍대·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낙동강의 청량산 주변 구간은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층이 주로 형성돼 있다. 이곳은 약 1억년 전에는 호수나 바다로 추정되며 그 증거로 퇴적암 지층에서 다수의 자갈과 모래가 발견된다고 한다. 지나가는 길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 유리보전과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청량정사(경북문화재자료 제244호)라도 보고 갈 심산이었으나, 들어가는 입구가 공사 중이라 다음 기회로 미룬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했다는 청량산을 뒤로하며 하류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군 구간이 끝나고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이다. 가송리(佳松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사리’와 ‘송오리’가 통폐합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풍수적으로 천옥(天獄)이라 불릴 만큼 폐쇄적인 지형으로 청량산 줄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으며, 한복판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특히 청량산이 빚어낸 가송협(佳松峽)은 안동 땅의 수많은 경승 가운데 첫째로 꼽을 만큼 산수가 아름답다.


                                       ▲가송협.


낙동강 건너 가송협(佳松峽) 자락에는 고산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된 고산정(孤山亭)은 안동의 청량산(淸凉山) 암벽 옆에 금난수(琴蘭秀)가 지은 것이다.


이황(李滉)의 제자인 금난수는 당시 선성(宣城, 안동 예안현의 별칭)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가송협(佳松峽)에 이 정자를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불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주변의 풍광이 뛰어나다.


금난수(琴蘭秀, 1530∼1604)는 본관 봉화(奉化)이며, 호는 성재(惺齊)이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등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켰다. 1596년(선조 29)에 성주판관(星州判官)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봉화현감을 하루 만에 사임하고, 귀가했다. 좌승지로 추증됐으며,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배향됐다.


                                      ▲고산정.


평소 금난수를 아낀 이황은 이 정자를 자주 찾아와 빼어난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고산정에 보존된 이황의 시 <서고산벽(書孤山壁)>은 금난수를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日洞主人琴氏子(일동주인금씨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

隔水呼問今在否(격수호문금재부)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聞(경부휘수어불문)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愴望雲山獨坐久(창망운산독좌구)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퇴계집> 권2에서-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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