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퇴계 이황 며느리, 사후에도 효도
기사 메일전송
<와야(瓦也) 연재>퇴계 이황 며느리, 사후에도 효도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10)
  • 기사등록 2022-10-16 10:34:10
  • 기사수정 2023-12-23 21:50:41
기사수정

【에코저널=서울】농암종택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됐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돼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옮겨와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으로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는데 하룻밤 묵으며 선인들의 체험을 경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농암종택 전경.


농암종택 아래 강변 오솔길을 따라 한속담 벽력암 등 절경이 초록빛이 짙어지는 나무 가지 사이로 스치고 지나간다. ‘퇴계 오솔길’은 사유지 관계로 해결이 안 되었는지 농암종택에서 단천교까지 건지산을 타고 돌아가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퇴계가 걸었던 길을 더듬으며 찾아간다. 길이 거칠고, 나중에는 끊긴다. 벼랑을 타듯 겨우 전망대까지 와서 숨을 고른다. 청량산 주봉들이 멀리 보이고 걸어온 길들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청량산 봉우리 사이로 하늘다리도 가물거린다.


옛날에 풍요로 왔던 강변마을엔 빈집들만 계속 늘어나고 봄갈이를 해야 할 넓은 밭은 집 나간 주인만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다. 길을 걸으며 폐허가 된 빈집들을 만날 때마다 한없이 가슴이 아려온다. 그 빈집들이 내가 살던 고향일 진데...고향을 떠날 때는 저마다 절절한 사연이 있겠지만 결국은 고향을 버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어찌할꼬.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를 지나면 도산면 원촌마을이 나온다. 원촌마을은 퇴계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진성이씨집성촌(眞城李氏集姓村)으로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고향이다. 마을 동쪽과 남쪽은 낙동강 줄기에 의해 형성된 드넓은 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강 건너 남쪽에는 왕모산(王母山, 648m)도 솟아 있는데, 이는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갈 때 동행했던 왕모 노국공주를 기리고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육사(李陸史)는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선비 집안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 한 때 처가가 있던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수학했다. 귀국해서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3년 형을 받고 투옥됐다. 이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출옥 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기자생활과 항일투쟁을 함께 펼친다. 주로 육사(陸史)와 활(活)이라는 필명으로 시와 산문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다. 자오선(子午線), 영화예술(映畵藝術), 풍림(風林)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40년 짧은 삶 가운데 20여 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했다. 1943년 가을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끌려가 이듬해인 1944년 1월 감옥에서 순국했다.


산은 가슴이 되고, 강은 팔이 되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곳, 안동의 북쪽 낙동강 상류에 있는 원촌마을에는 이육사 시비공원이 조성돼 있고, 이육사문학관도 있다.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냈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내 고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의 ‘청포도’와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의 ‘광야’가 입속에 맴돈다.


이육사문학관에서 산자락 고개 하나 넘으면 퇴계 이황의 묘소가 있다. 토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퇴계종택이 나온다. 퇴계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다. 묘소는 살아생전에 소박함과 검소함을 중시해 자신이 죽으면 비석도 놓지 말라는 유계(遺戒)에 따라 석물(石物) 장식을 사양했으나, 나라에서 최소한의 격식으로 만든 석물만 권해서 설치했다. 비석도 선조임금으로부터 추증(追贈)된 영의정 등 관직을 넣지 않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여 있다.


                      ▲퇴계며느리 봉화금씨 묘.


퇴계묘소에 올라가다 보면 맏며느리였던 봉화 금씨의 묘가 보인다. 며느리는 “내가 시아버님의 아낌을 많이 받았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다시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해 퇴계묘소 아래에 묻히게 됐다고 한다. 죽어서도 며느리의 극진한 부양을 받는 자애로운 시아버지 퇴계선생의 인품이 그려진다.


                                    ▲퇴계종택 전경.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년12월1일)로 지정된 퇴계종택은 원래의 가옥은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의 크기는 총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추월한수(秋月寒水)는 “가을 달이 찬 강물에 비치듯이 한 점 사욕이 없는 깨끗한 성현의 마음”에 비유한다고 한다.


청량산에서부터 퇴계오솔길을 따라 마지막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둘러보려 했으나, 입장시간이 마감(오후 5시)돼 들어가지 못하고,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로 이동한다. 오천유적지는 조선 초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世居)해 온 마을로 세칭 오천군자리(烏川君子里)라 불리는 유적지다.


이곳 건물들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구 예안면 오천리에서 집단 이건(移建)해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이 중 탁청정(濯淸亭)과 후조당(後彫堂)은 국가지정문화재로, 탈청정 종가(宗家)와 광산김씨 재사(齋舍) 및 사당(祠堂), 그리고 침락정(枕洛亭)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유물전시관인 숭원각(崇遠閣)에는 선대의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오늘을 마감하고 숙소로 가는 길목에 연미사(燕尾寺)에 있는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을 보러 간다. 이 석불상은 마애불로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다. 몸체와 머리가 각기 다른 돌로 됐는데, 몸체는 마애불처럼 새기고 머리는 조각한 특이한 모습이다. 본래 무너진 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이천동 석불’의 잔잔한 미소는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잘 알려져 있다.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불은 바로 연미사의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과객(過客)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 속칭 제비원이라 불렀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당시 연미사 석불에는 제비 모양의 누(樓)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은 제비의 부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연미사라고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곳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 가인이 그 뉘기며(중략)∼♬” 길게 늘어지는 남도민요 ‘성주풀이’의 본향이다.


넉넉하고도 묘한 석불의 미소는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부처님에 기대어 표출시키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국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라기보다는 오랜 민속신앙과 결합된 종교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관련기사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2-10-16 10:34:10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확대이미지 영역
  • ‘동해 품은 독도’ 촬영하는 박용득 사진작가
  • <포토>‘어도를 걸을 때’
  • 설악산국립공원 고지대 상고대 관측
최신뉴스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