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새 모습 볼 수 없다면 ‘끔찍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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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새 모습 볼 수 없다면 ‘끔찍한 일’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4)
  • 기사등록 2022-09-25 09:00:40
  • 기사수정 2023-12-24 1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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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승부역은/하늘도 세평이요/꽃밭도 세평이나/영동의 심장이요/수송의 동맥이다”


                                   ▲승부역 시비.


이 시는 1963년부터 19년간 승부역에서 근무한 김찬빈씨가 1965년 철도변 옹벽에 흰 페인트로 써 놓은 것을 역 앞마당의 새로 만든 비석에 적어 놓은 시다. 첩첩산중 오지마을의 자그만 역에서 느끼는 고독하고 쓸쓸한 서정만 읊은 것이 아니라 보람과 자긍심도 읽을 수 있다. 그때의 승부역은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였었다.


이렇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하늘 세평만 보인다는 승부역(承富驛) 구내에는 ‘백설공주’ 이야기를 형상화해 만든 공원이 있다. 일곱 난장이와 백설공주, 독이 든 사과로 공주를 유혹하는 마귀할멈도 조형물에 들어 있는데, 백마 탄 왕자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협곡열차를 타고 찾아오는 길손이 많아서 그런지 승부역에는 간이 시장이 형성돼 있다. 지역 특산물도 선을 보이고 막걸리로 목을 축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미리 이야기가 됐는지 마을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가마솥으로 끓여대는 육개장은 풍성한 오찬을 만들어 준다.


                                      ▲용관바위.


승부역 건너에는 ‘용관(龍冠)’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은 물은 ‘굴통소(窟筒沼)’라고 한다. 어느 장군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이곳 재를 넘어 귀향을 오는데, 꿈에 용이 나타나 “나는 굴통소에 사는 용인데 이 재는 나의 등이고 저 넘어 바위는 나의 갓이니 감히 이 재를 넘어 바위를 만지고 넘는 자는 모두 살아남지 못할지니 낙동강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그대로 행해서 무사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전에는 분천역까지 배바위고개를 넘어가는 산길이었는데, 지금은 낙동강 변으로 새로 길을 낸 것 같다. 새로운 길을 나설 때는 항상 약간의 흥분이 뒤따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데 강가를 따라가는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다. 웬만하면 자연 그대로 길이 됐고, 걷기가 힘이 드는 곳은 나무데크로, 절벽 같은 곳은 잔도(棧道)로 또는 철길 옆으로 길을 내었고, 중간중간에는 출렁다리를 만들어 놓아 걷는 재미도 한층 흥을 더한다.


가끔 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V자로 펼쳐지는 협곡이 마음을 빼앗는다. 벼랑길 같은 오솔길을 걸을 때는 봄을 싣고 오는 물소리에 맞춰 봄노래가 입술 안에서 흥얼거린다. 강물은 심한 S자로 굽이쳐 흐르는데 얄미운 철마는 물을 건너고 산을 뚫으며 직선을 긋는다. 작년 여름 장마에 떠내려왔던 나무는 늑목(肋木)이 되어 바위 위에 걸려 누워 있다.


어느 소나무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밑동부터 땅으로 굽다가 겨우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향한다. 땅으로 굽은 곳에 그네라도 매달았으면 하는 마음도 생긴다. 자연에 흠뻑 취해 어디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양원역(兩院驛)에 도착한다. 본래는 원곡(院谷)이라 했는데, 일제강점기 때 강을 경계로 원곡마을을 봉화와 울진으로 나눠서 양쪽의 원곡이라 하여 양원이라 한 것이다.


양원역은 기차가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주민들의 요구로 임시승강장으로 된 역으로 시설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승강장 주변으로는 주민들이 손수 가꾸고 거둔 농·특산물 간이판매장이 들어 서 있다. 승부역처럼 조 껍데기 막걸리로 목을 축일 수 있는 곳이다. 협곡열차를 타고 온 손님들도 양원역의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잠시 눈과 입을 즐긴다.


바람만 쉬어 간다던 양원역에서 막걸리 선술 한 잔에 다시 힘을 충전하고 강 따라 발을 옮긴다. 강 너머 언덕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벼락을 맞았는지 하늘로 솟아야 할 윗부분이 부러지고 가지는 하늘이 두려워 모진 세상을 한탄하며 아예 땅으로 향한다. 이곳은 흐르는 물소리도 더 크게 들린다. 휘돌아 가는 강을 가로지르기 위해 숨 가쁘게 높은 재를 넘고 철교 옆길을 따라 당도한 곳은 비동역이다.


비동역((肥洞驛)은 옛날 화전민들이 정착한 마을로 땅이 기름지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비동(肥洞)’이 됐고, 역 이름으로 따왔다. 이 역은 1일 6회 정차하는 백두대간 협곡열차 이용객을 위해 만들어진 임시승강장이다. 승하차는 가능하지만, 승차권 발매는 불가능하다. 역 시설은 승강장 외에 다른 시설이 전혀 없다.


비동역을 돌아 철교 밑으로 나오면 낙동강을 따라가는 포장된 길이 나온다. 꽁꽁 얼어붙은 낙동강을 배짱 좋은 어느 한 분이 얼음 위로 걸어가도 끄떡없다. 그 아래쪽 콘크리트로 포장된 섶다리 아래 얼지 않은 강물은 물비늘이 반짝인다. 섶다리를 건너면 승부역에서 배바위고개를 넘어와서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 봉화지역을 가르는 낙동강은 울창한 숲과 강가의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신비함을 더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의 가호(佳湖)라고 부른다. 바위를 차곡차곡 쌓 놓은 적석총(積石塚) 닮은 바위는 옛 고구려 땅 통구에 있는 장군총(將軍塚) 같은 위용을 안긴다. 자연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아∼소리가 절로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강변의 하천부지에 조성된 금강소나무 숲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 분천역에 다다른다. 분천역은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보통역으로, 역사(驛舍)의 주변이 온통 산타와 관련된 조형물들이다. 춘양목 벌채사업과 석탄 산업이 왕성하던 시기엔 열차 통행량과 모여드는 인구가 지금의 10배는 더 됐을 텐데, 이들 산업의 쇠퇴로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한다.


                                    ▲분천역.


분천역 앞에는 호랑이를 닮은 거대한 바위산이 있었는데, 1991년 지나가던 점쟁이가 이를 보며 “저 산 모양이 호랑이를 닮아 사람들이 무서워서 오지를 않는구나. 저 산을 깎아내면 이곳에 천호가 들어설 것”이라고 했다는데, 때마침 자갈공장이 들어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자 호랑이 형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이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20여년이 지난 2013년에는 V트레인과 O트레인 협곡열차가 개통됐고, 2014년에는 산타마을과 산타열차가 생겨 전국의 유명관광지가 되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곳이 산타마을로 변신한 것은 2013년 마테호른이 있는 스위스 체르마트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마을과 역을 산타마을로 꾸며 놓았다. 그리고 분천역에서 승부역으로 이어지는 길 이름도 ‘체르마트 길’로 명명됐다.


울창한 숲과 협곡이 어우러지고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혼을 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가호(佳湖)임에는 틀림없지만, 청둥오리 등 철새나 텃새인 백로나 왜가리 등 새의 모습을 석포에서 분천까지 내려오는 동안 한 마리도 눈에 보인 적이 없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섶다리를 건널 때도 물속을 헤엄치며 놀아야 할 물고기도 눈에 띄질 않는다.


“새들이 지저귀고 시끄러워야 할 봄에 적막한 기운만 감돈다면 얼마나 황량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세상의 모든 새들이 사라진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아이들에게 들려줄 새소리가 없다는 것, 숲속을 거닐며 내 귀를 간지럽힐 새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위용 있는 새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 쓴 <침묵의 봄>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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