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막장’은 신성해야 할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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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태백시는 강원 남부 내륙에 있는 도시다. 삼척시의 읍·면으로 있다가 1930년대 이후 무연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작은 시골마을이 우리나라 최대 탄광도시로 발전해 1981년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해 태백시로 승격했다.


주 연료를 무연탄으로 사용하던 주탄종유(主炭從油) 시절에는 강아지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부자도시’였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어 석유나 천연가스로 연료정책이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바뀌면서 석탄 산업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15만 명에 이르던 태백시 인구도 5만명을 밑돌게 됐다.



▲태백산 천제단.


고원관광도시로 새로 발돋움하는 태백시에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태백산(1567m)과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가 있는 금대봉(金臺峰, 1418m), 동쪽의 삼방산(三芳山, 1175m)과 연화봉(蓮花峰,1053m), 서쪽의 함백산(咸白山, 1573m) 등 연봉으로 둘러싸인 고원산지다. 하천은 검룡소가 처음 내를 이루는 골지천(骨只川), 낙동강의 최상류인 황지천, 그리고 이곳에서 발원하여 삼척으로 흐르는 오십천이 있다. 그래서 빗물이 떨어져 튕기는 방향에 따라 한강, 낙동강, 오십천으로 운명이 바뀌는 삼수령(三水嶺)이 태백시에 있다.


천변을 따라 나란히 나 있는 제35호 국도를 걸어 남으로 향한다. 쉼 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탄광근로자들의 진폐증(塵肺症)환자를 주로 돌보는 근로복지공단 태백병원 앞이다.


언젠가 막장 TV드라마가 판을 친다고 사회적으로 여론이 비등할 때 이곳에 왔더니, ‘막장’이란 말을 말도 안 되는 불륜이나 퇴폐적인 것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당시 탄광근로자는 열을 올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막장’이란 갱도(坑道)의 가장 막다른 곳을 가리키는데 그곳은 생과 사가 한순간에 넘나드는 공간으로 가장 신성해야 할 장소라는 것. 그러면서 “막장이란 말을 함부로 쓴다는 것은 막장근로자들을 모욕하는 언사”라고 전한다.


태백시 장성동 재래시장은 장날인가 보다. 전방 앞에는 각종 봄나물 등이 봄소식을 전한다. 의외로 산중의 깊은 고원도시임에도 싱싱한 미역 등 수산물이 눈에 많이 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그 화려했을 시장 골목은 나이 지긋한 아낙들이 대부분이다.



▲구문소.


옛날에 석탄을 운반하던 산 공중의 케이블은 새롭게 곤드라로 변신해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한참 후에 구문소 앞에 당도한다. 구문소 지역은 한반도 고생대(약 5억년 전∼약 3억년 전)의 지질사를 잘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고생대의 바다에서 생성된 석회암층에 나타나는 다양한 퇴적구조와 삼엽충(三葉蟲) 등의 화석들이 잘 보전돼 있어 당시의 퇴적환경과 생물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돼 보호하고 있는 지역으로 고생대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지질과학 체험현장이다.


고생대자연사박물관을 비켜서 구문소 위에 있는 자개루(子開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구문소로 내려온다. 구문소(求門沼)는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에서 솟아난 황지천이 이곳의 암반을 뚫고 지나면서 석문을 만들고 소(沼)를 이뤘다고 해서 ‘구멍소’ 또는 ‘구문소’라 부른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고문헌에는 ‘구멍이 뚫린 하천’이라는 뜻으로 천천(穿川)으로 기록 됐다고 하며,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 해서 ‘뚜루 내(뚫은 내)’라는 이름도 있다.


조선조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산경표(山經表)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 의하면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되어 물을 건널 수 없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원리처럼 비록 산은 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산 밑으로 구멍이 뚫려 낙동강의 1300리 길을 열어준다.


구문소의 생성원리는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이곳의 단층선을 따라 활발한 침식작용을 진행시키던 중 지하에 생성돼 있던 동굴과 관통돼 물이 흘러들면서 동굴을 점차 확장시켜 하천이 산을 뚫고 흘러가는 자연동굴이 됐다고 한다. 그리고 황지천으로 흐르던 물이 자연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사군드리’마을로 흐르던 곡류하천은 퇴각돼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구하도(舊河道)가 됐다.


구문소 안쪽 절벽에는 ‘五福洞天子開門(오복동천자개문)’이라는 글이 암각돼 있다. 이는 낙동강 최상류로 올라갈 때 구문소 석문이 나오는데, “자시(子時, 오후11시∼오전1시)에 열렸다가 축시(丑時, 오전1시∼3시)에 닫히므로 열린 시간에 통과하면 흉과 화가 없고 재난과 병이 없는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이상향을 태백이라고 표시한 것이란다. 이 글씨는 무진(戊辰)년인 1988년 정월 초에 태백의 향토사학자인 김강산이라는 사람이 새겨 넣었다고 한다.


김강산(68)이 글을 새기던 1988년 구문소 아래는 시커먼 탄천(炭川)이었다고 한다. 하수종말처리시설도 없던 시절에 탄광폐수도 함께 흘렀다. 그러나 그는 “때가 되면 여기가 보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계당국이나 매스컴까지 구문소 석벽에 새겨진 글자를 태고 적부터 있던 신비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포장한다고 한다. 구문소 안내판 어디에도 김강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조선일보 2018. 1. 31자 A18면 박종인의 땅의 역사 ‘태백 구문소의 비밀과 오복동(五福洞)’에서 인용>


정감록(鄭鑑錄)에서 정한 십승지 중의 한 곳인 태백의 구문소 안에서 빠져나와 다시 낙동강 따라 남으로 길을 나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점역(銅店驛)이 나온다. 석탄가루 날릴 때는 영주역과 동해역으로 가는 무궁화열차가 정차할 정도로 꽤나 북적거렸을 동점역이 지금은 여객열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으로 되었다. 이 역은 철암역에서 내려오는 급경사지역으로 유사시 기차가 피할 수 있는 피난선과 안전측선이 설치된 우리나라 유일한 역이라고 한다.


물 따라 몇 구비 돌고 돌아 강원도 태백시 구소문동과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이 만나는 경계지점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큰 장승이 반긴다. 그리고 비록 조형물이지만 반달곰 한 쌍이 앞발을 들어 인사도 한다. 경계를 금방 넘기가 아쉬워 숨을 고르고 한 10여 분 걸어가니 육송정(六松亭)이 나온다. 황지천과 송정리천이 만나는 육송정 삼거리까지가 황지천이고, 그 하류는 드디어 낙동강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육송정.


육송정의 여섯 그루 소나무는 뵈질 않는다. 몇 백 년 묵었을 금강소나무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뗏목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썰렁하다. 지금은 경복궁 어느 전각 기둥이 됐는지...


송정리천의 이름도 육송정 영향인 것 같다. 낙동강변의 잔설이 녹으며 흐르는 물소리는 봄의 소리 왈츠다. 버들강아지 눈망울은 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바람에 흔들린다. 봄바람을 가슴으로 안으며 즐겁게 도착한 석포역은 동짓달 그림자보다 더 길게 늘어진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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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18 08: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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