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이성계가 쏜 화살 꽂힌 ‘살곶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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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이성계가 쏜 화살 꽂힌 ‘살곶이벌’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67)
  • 기사등록 2022-07-30 08:28:11
  • 기사수정 2023-12-23 23: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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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탄천을 건너 청담대교 남단 밑을 지나 영동대교에 다다른다.


강남구 청담동과 삼성동의 개발의 큰 역할을 했던 영동대교(1973년 11월 준공)는 성동구 성수동으로 다리를 쭉 뻗었고, 청담동 쪽 아파트단지 아래 한강에는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노닌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악취가 진동해 한강 옆으로 지나가기를 꺼렸던 곳에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됐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두가 환경을 위해 노력하신 국민의 덕이다. 그러나 민물가마우지가 우점종(優占種)이 되는 것은 우려해야 할 일이다.


                 ▲한강과 탄천의 수면경계. 물 색깔이 다르다.


같은 물이라도 흘러온 강에 따라 바로 혼합(混合)이 안 되는 것 같다. 한강 본류를 따라 계속 흘러온 물은 맑고 투명한데, 탄천에서 흘러나온 물은 맑으면서도 투박한 느낌을 주며 두 물의 경계가 뚜렷하다. 이러한 현상은 두 물의 수질(水質)과 수온(水溫) 등의 차이로 일어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춘천 의암호에 유입되는 북한강과 소양강 물의 혼합상태를 측정한 결과 약 1.5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기록이 아물거린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서울 남산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영동대교 북단 화양동(華陽洞)은 조선 시대에 이곳에 새워진 화양정(華陽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속설에는 “병자호란 때 인질로 끌려간 부녀자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환향녀(還鄕女)들이 살던 마을”이라 붙여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종(端宗)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쫓겨 갈 때 부인 송씨와 이별하며 회행(回行)하기를 기원했다고 해서 ‘회행리(回行里)’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1979년 10월 준공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는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상판이 내려앉은 참사를 아는지 말없이 자동차만 바쁘게 달린다. 그때 강 건너 학교로 등교하던 학생들의 희생이 많았다. 시공사 부실공사라는 사고 조사결과 발표도 있지만, 평소 교량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됐는지도 꼼꼼하게 따져볼 일이었다. 그 뒤 서울시에서는 1996년 3월부터 기존 다리를 헐고, 새 성수대교를 세우기 시작해 2004년 9월에 왕복 8차선으로 확장했다. 길이 1161m, 너비 35m다.


잠실 쪽에서 서북방향으로 물줄기가 흘러가다가 그 물 모퉁이를 이뤄 서남으로 방향을 바꾼 곳이 압구정(狎鷗亭)이 있던 언덕이다. 이 언덕에 수양대군을 도와 권세를 잡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말년에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라는 뜻으로 지은 자신의 호와 같은 이름의 정자인 압구정(狎鷗亭)에는 지금도 갈매기들이 날아와 다른 철새들과 어울려 노닌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섬이 하나 있었다. 중랑천이 한강으로 치고 들어올 때 토사가 쌓여 만들어진 ‘삼각주(三角洲)’. 두 물이 부딪히는 곳에 섬이 있어 물살이 유유하며 섬 안에는 구릉과 연못과 모래밭이 펼쳐지는 ‘저자도(楮子島)’.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로 불리는 이 섬은 속칭 ‘옥수동 섬’이라고도 한다.


옛 압구정이 있던 곳에서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 일대를 바라보면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멀리 북한산 봉우리들까지 한눈에 들어와 중국 사신들의 접대자리로도 이용됐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앞을 흐르는 한강 구간을 따로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옥수동과 금호동 일대의 강을 경강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호(東湖)’라 했다. 저자도(楮子島)는 동호의 아름다운 자연을 대표하는 자연자산이었다. 고려 때에는 한종유(韓宗愈)란 사람이 여기에 별장을 두었고, 조선 때에는 세종이 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해 그의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물려주어 대대로 소유했다. 조선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기도 했다.


저자도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동도(舞童島)라고 부르기도 했고, 옛날 이 마을에 집오리를 많이 길러서 압도(鴨島)라고도 했다. 1936년 뚝섬의 제방을 쌓을 때와 중앙선 철도를 부설할 때도 이 섬의 흙을 파다가 사용했다. 1970년대에는 공유수면 매립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파내 지금의 압구정동 택지를 조성하는 데 사용해 한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성수대교 북단에는 성동구 성수동으로 뚝섬체육공원 일대에 2005년 6월에 문을 연 35만평 규모의 서울 숲이 조성돼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녹색공원이 적은 서울 동북부지역의 시민을 위해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대규모 도시 숲을 만들기 위해 친환경적으로 숲과 동물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자연 그대로의 숲을 재현한 곳이다. 서울 숲 안의 472m 보행교는 한강 선착장과 연결하는 통로이고,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승강기도 설치해 놓았다.


뚝섬은 조선 태조부터 성종까지 약100여 년간 151차례나 왕이 직접 사냥을 나온 사냥터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 경칩과 음력 9월 상강에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하면서 독기(纛旗, 소꼬리나 꿩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를 세우고 독제(纛祭)를 지냈기 때문에 유래했다. 한강과 중랑천에 둘러싸인 지형이 마치 섬처럼 보이고 ‘독기를 꽂은 섬’이라고 하여 독도(纛島)로 불리다가 ‘뚝도 또는 뚝섬으로 소리가 바뀌었다.


서울 숲 모퉁이를 돌면 의정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철새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중랑천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용비교 밑으로 중랑천을 자전거와 사람이 건너는 교량이 있고, 교량을 지나면 봄마다 개나리로 노랗게 물드는 응봉산이 있다. 응봉산(鷹峰山, 81m)은 임금이 매사냥을 하던 곳으로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 북쪽이다,


                                  ▲살곶이다리 상판.


용비교 쪽으로 우회전해 중랑천 초입으로 들어서면 ‘살곶이 벌’이 나온다. 살곶이벌은 조선조 초기 왕자의 난으로 보위에 오른 태종(이방원)이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이성계)가 만났던 곳으로 태종을 보자 화가 치민 태조가 화살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이에 태조는 하늘이 뜻이라며 태종을 인정하게 됐고, 그 후로 이곳을 화살이 꽂힌 벌판이라고 해서 ‘살곶이벌’이라고 한다.


                                     ▲살곶이다리.


살곶이다리는 세종 2년(1420) 5월에 상왕(태종)이 다리 공사를 명해 시작됐다. 세종 4년(1422)에 상왕이 죽자 방치되다가 이곳을 오가는 백성들을 위해 성종 6년(1475)에 이르러 다시 공사를 시작해 성종 14년(1483)에 완성됐다. 다리는 길이 75.75m 폭 6m인데 조선 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의 광나루를 통해 나가면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갈 수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 변에 닿아 선정릉(宣靖陵)과 헌인릉(獻仁陵)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 길이 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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