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몽양 여운형의 친필 ‘애오와(愛吾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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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몽양 여운형의 친필 ‘애오와(愛吾窩)’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57)
  • 기사등록 2022-06-25 07:38:44
  • 기사수정 2023-12-23 23: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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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옥천면(玉泉面)은 양평군 중앙 서부에 위치하는 면으로 소재지는 옥천리다. 본래 양근군 고읍면(古邑面)으로 1908년 양평군에 편입되고, 1937년에 옥천면으로 개칭됐다. 중미산(仲美山, 834m) 등 면 전체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옥천면 교통은 중앙선 철도의 아신역(我新驛)이 있으며, 국도(6호와 37호)가 지나고, 중부내륙고속도(양평∼경남 창원)의 기종점이 옥천리다. 옥천리는 옥처럼 맑은 우물이 여러 군데 있어 옥천리라 했다. 마을을 따라 사탄천이 흐르다가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맛이 좋아서 그런지 55년 전통의 옥천냉면은 면발이 굵으면서도 쫄깃쫄깃하고 튕길 듯 탱탱하며 한우 수육과 동그랑땡 완자를 곁들여 먹는 맛은 일품이라고 한다.


아신역 교차로에서 다시 강변으로 진입해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아랫길로 접어들어 양서면 대심리로 들어선다. 원래 이 길은 제6호 국도였으나, 4차선으로 확장 이전하는 바람에 지금은 한적한 남한강변길이 되어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높다. 이 도로의 끝점에서 오솔길로 접어들면 양서면(楊西面) 대심리다. 양서면은 양평군 서부에 위치하는 면으로, 남·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어 더 유명한 곳이다.


대심리(大心里)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탄리(大灘里)와 상심리(上心里)를 합쳐 대심리가 되어 양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건너말, 상심, 한여울 등이 있다. 건너말은 한여울 건너 쪽 마을을 말한다. 상심마을은 한여울 동쪽 남한강 변의 마을로 대구 서씨의 선조가 지었던 상심정(上心亭)에서 유래했으며, 농장과 별장이 있다. 한여울은 대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큰 여울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대심리는 남한강과 국수역 앞 제6호 국도 사이에 성자봉이 가림막을 하여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한때는 난개발에 휘말렸으나, 지금은 전원주택지로 안정이 되어 복잡한 도회지를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한다. 마을 골목의 카페나 문화시설 등 정비상태나 마을회관의 규모가 이곳 현재 상태를 말해준다.


남한강 가운데에 있는 개인소유의 거북섬을 지나치면 서울 쪽으로 제6호 국도와 만나 4차선 차로에 다시 올라선다. 소음과 매연으로 폭주하는 차들을 스쳐가며 1㎞ 정도 걷다가 자전거 길로 올라서 중앙선 신원역에 도착한다. 신원역(新院驛)은 양수역과 국수역 사이에 있는 중앙선의 기차역으로 2009년 12월 국수~용문 연장 구간 개통에 맞춰 신역사가 완공돼 수도권 전철 중앙선 전동차가 정차한다.


                                 ▲몽양 여운형 동상.


신원역에서 몽양길을 따라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섶 돌 위에 새겨진 16기의 몽양 여운형의 어록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 <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여러 어록 중에 눈에 띈다.


                           ▲몽양 친필 ‘애오와(愛吾窩)’.


마당으로 올라서기 전에 <묘골애오와공원(妙谷愛吾窩公園)>을 만난다. 묘골은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는‘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친필로 쓴 이 글귀를 돌에 새겨뒀다고 한다. 몽양은 그 의지가 왜곡되고 사상이 의심되어 한때는 금기시하는 인물이었으나,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지상 1층은 복원된 여운형의 생가이며, 지하 1층은 기념관으로 이용된다. 함양 여씨(咸陽 呂氏)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 지어진 생가는 여운형이 출생한 곳으로, 부친 탈상 후 서울로 이사한 1908년까지 살았다.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 지낸 장소다. 한국전쟁 중 소실됐다가 2001년 생가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됐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2011년 복원됐다.


몽양기념관에는 여운형의 삶의 궤적을 따라 관람할 수 있도록, 출생과 애국계몽운동(1886~1913), 독립운동(1914~1945), 건국준비활동과 좌우합작운동(1945~1947), 서거(1947년 7월 19일)로 나눠 그의 생애에 관해 설명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했다. 여운형의 사진, 친필, 관련 도서들을 전시한 정관재(正觀齋), 여운형 좌상, 크로마키 촬영 공간, 추모 영상을 상영하는 영상실이 함께 있다. 같은 층의 매진 홀에서는 여운형과 관련된 다양한 기획 전시가 열린다.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생가와 몽양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몽양은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해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주도했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1947년 7월 19일 암살됐다.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재직할 때인 1936년에는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을 제패해 월계관을 머리에 쓴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항거(신문사는 일제에 의거 강제 폐간)하고,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던 몽양의 기개(氣槪)를 회상해본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완의 장으로 남은 몽양의 소원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빌며 오늘의 장정을 마무리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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