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여주 신륵사에 전해지는 ‘세 분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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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여주 신륵사에 전해지는 ‘세 분의 스승’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50)
  • 기사등록 2022-05-28 19:49:19
  • 기사수정 2023-12-23 2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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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신륵사관광지 안에 있는 숙소에서 새벽에 눈을 뜨니 아직도 밖은 깜깜하다. 가까운 신륵사를 산책하기 위해 새벽공기 가르고 숙소를 나서보니 그릇을 굽는 가마는 불이 환하다. 가마를 지키던 젊은 도공들은 소나무 장작불의 관리를 위해 밤샘을 한 것 같다.


여러 단계로 불길이 올라가는 과정마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가 보다. 이틀을 불로 굽고 삼일 동안을 서서히 식혀야 완성품이 나온다고 한다. 대단한 끈기와 집념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여명(黎明) 직전의 어둠이 더 짙고 그 위에 안개가 덧칠을 한다.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는 대웅전 대신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極樂寶殿)이 본당이다.


                                  ▲신륵사 삼층석탑.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강변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처음 윤곽을 드러낸 게 신륵사 삼층석탑이다. 경기도문화재자료(제133호, 2004년 11월)로 지정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으로, 다층전탑(多層塼塔) 부근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석탑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 후기에 건립됐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있는 기록을 볼 때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고려 말의 고승 나옹혜근을 다비(茶毘)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강월헌(江月軒)은 육각정으로 남한강 변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 남한강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현재 위치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강월헌에 올라 안개 낀 여강(驪江)을 바라보니 나옹선사의 선시(禪詩)가 저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견아 무언이생)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견아 무진이생)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解脫嗔怒 解脫貪慾, 해탈진노 해탈탐욕)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山如水 生涯以去, 여산여수 생애이거)

-강월헌-


여주 신륵사에는 나옹(懶翁) 무학(無學) 목은(牧隱) 세 분의 스승이 있다. 나옹선사는 고려와 함께 쓰러져 가던 불교를 재충전해 조선으로 넘겨준 큰 스님이다. 그가 입적한 신륵사는 나옹선사의 기념관이라 불릴 만큼 관련 문화재가 많다.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다. 신륵사는 나옹과 함께 고려 시대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사찰이었다.


무학대사(1327∼1406)는 조선 최초이자 최후 왕사이다. 그는 18세에 출가해 1353년에 원(元)에 가서 인도의 지공(指空, ?~1363)과 고려 나옹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해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가 됐다. 1414년에 황해도 평산 연봉사(烟峰寺)에 작은 거실을 마련해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했다. 그는 <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해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그릇된 견해를 반박했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의 스승으로 조선에 성리학이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신륵사에 대장경과 대장경각을 지어 봉안했고,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세우기도 했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師傅)가 됐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다가 1396년 5월 7일 여주 신륵사(神勒寺) 부근 연자탄(燕子灘, 제비여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갑자기 별세했다.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에는 기단 부분은 화강석으로, 탑신부(塔身部)는 벽돌과 축조된 6층인지 7층인지 애매모호 한 탑이 하나 있다. 그래서 이름이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다. 보물(제226호)로 지정된 이 탑은 높이 약 9.4m다. 구조는 일반 석탑의 기단과 유사한 2중의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다. 이같이 전체의 형태가 이례적이고, 벽돌의 반원 모양의 배열도 무질서한 것은 후세의 무지한 수리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고, <경률론(經律論)>을 인출(印出)·수장하던 대장각 조성을 기록한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가 있다.


이색은 공민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부모님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했고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해 1380년(우왕 6)부터 만들게 했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다. 현재 몸체의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돼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며, 높이 1.33m로 보물(제230호)이다.


나옹선사의 또 하나의 유물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이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다. 보물(제228호)로 지정된 이 석종은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1376년(우왕2)에 입적하게 되자 1379년(우왕5)에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잡아 세운 것이다. 이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한 단층 기단에 받침 2단을 쌓은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다. 고려 후기 석종 형태의 승탑 양식이다. 석종 옆에는 나옹의 행적을 기린 비가 있고, 불을 밝히는 석등이 서 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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