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고려 공양왕 피거한 마을 ‘손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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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고려 공양왕 피거한 마을 ‘손위실’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41)
  • 기사등록 2022-04-30 06: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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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한참 발굴 중인 너른 절터를 지나 산모퉁이로 올라서면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있다. 법천사 터에 세워진 지광국사(984∼1067)의 탑비로, 국사가 1067년(고려 문종21)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현묘탑비.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는데, 이는 왕사(王師)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긴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오석(烏石)으로 된 비 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어 지금이라도 승천하는 모습이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뤄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국보(제101호)로 지정돼 현재 경복궁에 있는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玄妙塔)은 한국의 석탑 중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탑이다.


원주 출신인 지광국사는 왕사와 국사(國師)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전체 높이는 6.1m로 원래는 이곳 법천리(法泉里) 법천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반환돼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 수탈과 한국전쟁에 탑신이 붕괴되는 아픔을 견뎌내며 원주를 떠난지 108년 동안 떠돌아다니다가 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측되는 법천사의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이미 절터에 마을이 형성된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법천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깃발을 달게 된다. 이 깃발을 거는 길 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당간은 무쇠로 되어 있어 대부분 일제 때 철의 공출로 많이 없어졌다.



▲법천사 당간지주.



이 당간지주는 지광국사현묘탑비와 함께 남아있어 법천사 절터를 지키고 있다. 기둥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마련해 놓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또 하나 이 절터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속이 텅 빈 채 절터 입구에 서 있는데, 이 절의 영욕을 말해준다.


법천사지를 나와 부론면 손곡리로 이동한다. 손곡리(蓀谷里)의 원래 이름은 손위실(遜位室)이다. 이는 고려 말에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마지막 ‘왕위를 내주고 피거(避居)한 마을’이라고 해서 불러진 이름이다. 공양왕의 호가 손곡이라 지명이 됐고, 조선시대 서얼 출신 이달(李達)은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詩文)으로 달래며 지금의 부론면 손곡리(蓀谷里)에 은거하며 호를 손곡이라 하고 제자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말년에 허균(許筠)을 가르쳤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손곡 시비.


허균의 <홍길동전>은 그 당시 그의 스승인 이달(1539∼1612)의 한을 소설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손곡의 묘소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허균이 엮은 손곡집(蓀谷集) 등이 있다. 지금 원주시 부론면 손곡1리 노변에 손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의 내용은 ‘손곡집 권 6’에 실린 예맥요(刈麥謠)다.


시골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없어


(田家少婦無夜食, 전가소부무야식)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길로 돌아오니


(雨中刈麥林中歸, 우중예맥임중귀)


​생나무습기로 연기만 나고 불길은 안 일어


(生薪帶濕煙不起, 생신대습연불기)


​문에 들어서자 아이들 옷깃 잡고 울부짖네


(入門兒子啼牽衣, 입문아자제견의)


손곡 시비 바로 옆에는 임경업장군추모비(林慶業將軍追慕碑)가 서있다. 충주 달천 출신으로 알려진 임경업(1594∼1646)은 이곳 부론면 손곡리에서 출생해 어려서부터 전쟁놀이 등 힘겨루기를 좋아했으며, 항상 이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린 부하가 말을 안 들으면 군율을 어겼다고 낫으로 찍는 등 심한장난으로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이런 연유로 6세 때 충주로 이사했다고 한다.


임경업은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합격한 조선의 명장(名將)이 되고, 명·청(明靑)교체기에 나라를 위해 많은 공을 세우지만, 국법을 어겼다는 누명을 쓰고 인조(仁祖)의 친국 때 모진 매로 숨진다. 1697년(숙종23) 12월 왕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됐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됐다. 이 추모비는 1968년 원주문화원의 고증을 거쳐 장군의 생가터에 세웠다고 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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