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고구려비전시관서 느끼는 위용과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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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고구려비전시관서 느끼는 위용과 기세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37)
  • 기사등록 2022-04-16 08:39:19
  • 기사수정 2023-12-24 21: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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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오후 첫 일정은 다시 중앙탑면으로 건너와 용전리에 있는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전시관에서 시작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석비(石碑)로 원본이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비전시관은 충주고구려비를 전시한 <고구려의 천하 관>과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 벽화 관>, 세계 최초의 철갑전사인 <개마무사 관>으로 구분했다.


                               ▲고구려비 기념관.


<고구려의 천하 관>에 보존된 충주고구려비는 마을 어귀에 아주 오래전부터 돌기둥 하나가 서 있어서 마을이름이 입석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돌기둥을 대장간 집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돌에다 떡을 바치며 득남을 원하기도 해 마을을 지키는 수호석(守護石)으로 여기고 있었다. 1979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해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돼 있었다.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우리 고대사를 푸는 열쇠로 만주부터 남한강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준다.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삼국의 정치적 관계와 문화적 교류,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줌은 물론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 이두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라의 이두(吏讀)가 고구려에 기원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안악3호분 벽화 관>은 북한 국보 제28호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57년 제작된 고분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중 가장 크다. 무덤의 규모와 짜임새, 벽화의 구성, 표현방법이 뛰어나 4세기 중엽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문간방과 2개의 곁방, 널방 등 4개의 방에 ‘ㄱ’자 회랑을 갖춘 33m 규모다. 벽화는 각종 생활도와 250여명으로 구성된 대형행렬도가 장관을 연출한다.


                                 ▲안악3호분 현실.


2018년 7월 중국 요녕성 우하량(牛河梁)이란 곳으로 홍산문명을 보러 갔었는데, 그곳의 유물 중 여신묘(女神廟)의 현실(玄室)을 본 적이 있다. 이 여신묘의 현실은 평면 ‘中’자형의 반지하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중심 구조물은 주실과 양측의 동측실과 서측실, 주실 남북의 남실과 북실, 남실 남측의 남단실(南單室)로 구성돼 있다.


나는 이 여신묘를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아 멍한 기분이 들었다. 어쩜 충북 충주의 <고구려비 전시관>에 전시된 <안악3호분>의 현실(玄室) 내부구조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닮아도 너무 닮았다. BC 4000∼BC 3000년 전의 유물과 AD 357년에 제작된 고분의 현실 배치도와 규모가 거의 같다. 최소 3000년 이상 시공(時空)의 간극을 메꾸는 것 같다.


또한 <안악3호분>의 ‘견우와 직녀’ 벽화와 ‘우하량(牛河梁)’이란 글자가 자꾸 겹쳐진다. 우하량의 ‘우하(牛河)’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만나기 위해 필히 건너야 하는 은하수(우하)’이고, ‘량(梁)’은 ‘칠월칠석 날 두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은하수의 오작교(烏鵲橋)’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의 이러한 상상이 맞는다면 고조선 이전부터 우하량을 포함한 만주지역이 이미 우리 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역사는 실증(實證)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퍼즐게임이 아닐까…?


                      ▲천등산휴게소 개마무사상.


<개마무사(鎧馬武士)>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돼 있다. 이는 사람과 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철편(鋼鐵鐵鞭)을 가죽으로 이어붙인 철갑(鐵甲)을 착용하고 긴 창(槍)을 주 무기로 사용함으로써 기동성과 공격력에 단단한 방어력을 부가해 그 위용과 기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활용한 것은 우수한 철기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서양보다 천 년 앞서서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증거이며, 그 시대의 아이콘이다.


삼족오(三足烏)는 태양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상상의 길조(吉鳥)인 동시에 세 발 달린 검은 새로 천손(天孫) 의식이 깊은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양사상은 한민족의 원형적 사유구조라고 볼 수 있어 해와 달, 하늘과 땅을 근본으로 삼아왔다. 전시관 입구에 세운 삼족오 조형물과 전시실 안에 있는 태양 속의 삼족오를 보며 만주 벌판을 누볐을 광개토대왕의 위용을 다시 생각해 보며 소태면 양촌리로 이동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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