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청룡사지와 보각국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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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조선 초 개국공신 권근(權近, 1352∼1409)도 이곳에 들렸다가 호(號)를 ‘양촌(陽村)’으로 지었다는 양촌리(陽村里)는 충주시에서 목계리를 지나 소태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목계나루와 같이 남한강 수운을 이용한 교역으로 선박장이 생기고, 경제 환경이 좋은 덕분에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앞에 남한강이 여우섬을 돌아 흐르는 달여울(月灘)과 막흐르기여울(莫灘)이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동리(松洞里), 월촌리(月村里), 선창리(船倉里)를 병합해 양촌리로 했다.


소태면 중청리에는 등대(燈臺)가 있다. 일반적으로 등대는 섬과 암초가 많은 바다에 항해용 등대와 항공기용 항공등대로 많이 설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남한강 변에도 설치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선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 같다.



▲물무궁화.


물에서도 잘 자란다는 물무궁화도 빨간색 뺨으로 가는 세월과 볼을 비비는데, 얄미운 가시박은 앙칼진 발톱으로 하천부지 수생식물들을 질식시킨다.



▲벼락으로 갈라진 느티나무.


마을 어귀 느티나무는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데, 가까이 가보니 벼락을 맞아 반으로 갈라져 한 그루가 두 그루처럼 됐다. 표지판에 수령이 3백년으로 표시돼있는 보호수인데, 이를 관리한다는 마을 어르신은 “나이가 더 많다”고 말씀하신다. 땀을 식힌 발길은 충주 청룡사 터로 향한다.


청룡사지(靑龍寺址)는 소태면 오량리 뒷산인 청계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옛 절터다. 청룡사의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미상이다. 설화에 의하면 어느 화창한 봄날 한 도승이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사라지면서 비가 멎었다. 산세를 자세히 살펴본 도승은 그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음을 상기한 도승은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靑龍寺)’라고 했다.


고려 말 국사였던 혼수(混修)가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조선 태조 1년(1392)에 입적했다. 태조는 혼수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절을 크게 중창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됐다. 청룡사지에는 국보(제197호)인 충주청룡사지 보각국사탑과 보물(제658호)인 보각국사탑비 및 보물(제656호)인 사자석등이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제242호)로 지정된 충주청룡사 위전비와 3기의 석종형부도 등이 있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던 사찰 터다.


국보(제197호)로 지정된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은 고려 말의 고승인 보각국사(1320∼1392)의 묘탑이다. 묘탑은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승탑(僧塔) 또는 부도(浮屠)라고도 하는데, 후기 신라부터 조선 초까지는 8각 원당형(圓堂型)이 주류를 이루며, 이후로는 종모양 묘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지대석과 몸돌 윗면에는 사리공이 있어 사리 및 옥촛대, 금송아지, 금잔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했다. 이 부도는 원위치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했고, 상륜부는 지하에 파묻혔던 것을 원위치에 복원했다.


1394년(태조3)에 건립된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는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를 지낸 보각국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비문(碑文)은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으며, 문인(門人)인 희진(希進)이 세웠다. 비신 높이 322㎝, 너비 115.5㎝, 두께 20.5㎝. 석재는 화강암으로, 개석은 없고 네모난 대석(臺石)과 비신으로 구성돼 있다. 비 앞면의 하단부와 뒷면의 상단부가 파손됐으며, 여러 부분이 마멸됐다.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명등(長明燈)으로 조선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 정사각형이다. 아랫부분에 한 마리의 사자가 조각돼 있어 사자석등으로 부른다. 지붕틀은 두툼한 방석처럼 만들어져 있어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했으며, 양주 회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자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충주청룡사지 석종형승탑.


청룡사지 석종형승탑(石鐘形僧塔)은 석종 모양의 승탑이다. 전체 높이가 1.98m로 비교적 대형 크기에 속한다. 탑신(塔身)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탑의 몸 앞면 가운데 부분에는 마모가 심해 육안으로는 쓰인 글씨를 쉽게 알 수 없으나 ‘적운당사리탑(跡雲堂舍利塔)’이라 쓰인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지에 전하는 여러 석조유물과 함께 당시의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54호)다.


청룡사지 입구에 세워진 위전비(位田碑)는 현재 폐사된 청룡사(靑龍寺)가 신도들로부터 기증받은 전답 등의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으로, 1692년(숙종18)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해 시주를 한 불자들의 이름과 시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다. 귀부(龜趺)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비신 위에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지붕돌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사원(寺院) 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제242호)로 지정됐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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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4-17 08: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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