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야(瓦也) 연재>온달장군 기상 숨쉬는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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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야(瓦也) 연재>온달장군 기상 숨쉬는 ‘온달산성’ 한강의 시원(始原)을 따라(23)
  • 기사등록 2022-02-26 08:29:28
  • 기사수정 2023-12-23 16: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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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저널=서울】“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라고 설법하는 구인사에서 온달관광지로 이동해 온달산성으로 오른다.


온달산성 가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해서 오르기가 숨 가쁘다. 도중에 만나는 사모정에서 잠시 강줄기 내려다보며 숨을 고른 후 온 만큼 다시 올라가면 성벽 끊어진 틈으로 들어간다. 이곳이 온달산성의 북문 자리다. 성의 둘레는 683m로 그리 크지 않으며 남서쪽으로 치우친 봉우리와 북쪽으로 흘러내린 비탈을 에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온달산성 전경.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영양왕 1년(590)에 온달이 왕에게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나 그곳 백성들이 통한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되찾겠습니다”하고 아뢰고 “계립령(지금의 충주시 지릅재 일대)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출정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온달산성 북벽.


사적 제264호로 지정된 온달산성은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져왔다. 그러나 남한강 건너 북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의 위치나 북서쪽에만 문이 없고 성벽도 특히 높은 점 등은 신라가 북쪽의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축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해 신라가 강 건너 북쪽을 노려보며 전초기지로 쌓은 것 같다. 그래서 온달은 이 성을 쌓았다기보다 이 성을 치려다 전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온달산성 서벽.


어쩌든 온달의 전설이 살아 움직이는 온달관광지로 다시 내려와 향산여울이 일렁이는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삼층석탑으로 이동한다. 이 석탑은 신라 눌지왕 19년(435년)에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呼子)가 깨달음을 얻은 이곳에 향산사를 처음 건립했는데, 묵호자가 죽은 뒤 제자들이 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모셨다. 향산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삼층석탑만 남아 있었는데, 1935년 사리가 도굴꾼에 의해 도난당하고 완전 해체된 것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향산리에서 남한강 여울을 따라 다시 하류로 걸어간다. 강 건너 가곡면 가대리마을 앞에는 ‘가대여울’이 물살을 가른다. 가대리 문화마을 뒤로 우뚝 솟은 노갈봉은 ‘노인이 갈잎으로 만든 도롱이를 쓰고 남한강 물에 낚시를 드리운 산세를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너른 여울엔 쏘가리, 누치, 피라미 등의 자원이 풍부해 견지낚시와 루어낚시꾼들이 진을 친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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