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도 의원
정치가가 안줏감이 되는 세상에서 술맛은 어떤지 모르지만 밥맛은 떨어진다.
술자리에서 정치가는 곧잘 안줏감이 되곤 한다. 그것도 질근질근 씹어야 제 맛이 나는 마른 오징어 꼴이다.
"그X 정말 웃겨. 그 XX 왜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거야? 권력의 맛을 보더니 아주 꼴불견이 됐군." 그보다 더욱 심한 욕설이 퍼부어지곤 한다. "국민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제 X이 민주주의 특허권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그 XXX들을 보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나."
차마 옮기기조차 민망한 말들도 있다. 이 정도라면 정치가 집단은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한 현실이니 "정치가가 없어야 정치가 잘 된다"는 선문답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론 조사를 하면, 정치가 집단은 예외 없이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류로 손꼽힌다.
초등학생 웅변가가 이렇게 말한다.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정치가가 올바른 정치를 해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 비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흥! 말이나 못하면 덜 밉지, 하는 촌평이 따라붙는다.
어쩌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정치가의 책임이 가장 크다. 말끝마다 국민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손아귀에 쥔 권력을 지키고, 키우고, 누리기에 바빴던 정치가들에 대한 국민의 냉엄한 심판이다.
그런데, 정치권에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들어와도, 그래서 변화의 조짐이 보여도 술자리에서 안줏감이 되는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어야 한단 말인가?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무관심이 팽배한 현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 이로움은커녕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막대한 해를 끼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정치가 바로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정치가는 제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 나는 정치가가 국민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방식으로는 당면한 과제를 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희망찬 미래를 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비전과 희망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나는 사람의 본성을 똑바로 보고, 그 본성을 바탕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주장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게 무슨 뜻일까? 루소의 사상에 대한 나의 감상문보다는 객관적인 평가가 이해를 더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전에는 루소가 그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루소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 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 제도나 문화에 의해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 즉 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와 문화가 인간의 본성을 침해하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조장해 그 결과로 사회의 온갖 악이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에 기꺼이 찬성표를 던진다. 루소의 지지자 혹은 추종자는 아니지만, 그에 대해 많이 알지도 못하지만, 그런 관점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련해 생각해 볼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가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그 문제들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문제가 있어 보인다. 먼저 저출산의 문제를 보자.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 못 면한다'느니,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 하는 구호가 세상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이제는 아이를 너무도 적게 낳아 문제라고 말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몇 십 년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인위적으로 산아 제한을 해야 한다며, 그것이 마치 진리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높이던 사회가 딱하다. 그런데 이제 다시 또 인위적으로 저출산의 문제를 풀겠다는 태도를 보이니, 이 역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출산 장려책으로, 다출산을 한 가정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들이 많은데, 그걸 해법이라고 보는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세우는 호도의 방편일 뿐이다. 요즘 가정에서, 여자들이 과연 돈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아이를 낳기만 하면 사회가 키워 준다는 나라에서도 출산율은 떨어져 왔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여자들이 아이를 적게 낳고, 넉넉하지 않은 여자들이 오히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출산 장려금을 준다고 미래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많이 낳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틀린 관점이다.
요즘 부부들, 특히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자기 인생을 저당 잡히려 하지 않는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요즘 세상에는 자식이 주는 기쁨 이외에도 누리고 즐길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것들을 통해 자기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벼이 보고, 약간의 돈으로 생활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고령화 문제도 우리에게 매우 무겁게 주어져 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니, 노인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출산율은 저조하니, 사람들은 먼저 이런 고민을 한다. 일할 젊은이들은 줄고 있고, 부양해야 할 노인들은 늘고 있으니 고령화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겠느냐 하는 우려이다. 이런 우려는 사람을, 노동력 있는 젊은이와 노동력 없는 노인으로 둘로 나누고, 그 둘을 대립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한 관점은 노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한다. 존경은커녕 심할 경우 노인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노인 역시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니 사회는 노인을 생계비를 지원해 주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다.
노인에게 일할 기회를 마련해 주고, 스스로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21세기 과학 문명사회는 근육노동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과거와는 다르다. 노인들도 얼마든지 일하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고, 그에 따르는 사고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 노인은 약자라는 과거의 의식, 노인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과거의 제도, 그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고령화는 불행의 지표가 될 뿐이다. 설사 노동력을 거의 잃은 노인들이 늘어난다 해도,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산성을 높이면 나라 전체의 부를 얼마든지 늘릴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 행정수도 이전 문제, 부동산 문제 등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 비정규직, 지역불균형발전, 부동산대책, 환경문제 등을 대립주의의 관점으로 보고, 낡은 과거의 방식으로 풀려 하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다. 인위적인 틀에서 벗어나, 사람의 본성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길은 보인다.
정치가들이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다면,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술자리에서 어느 누가 정치가들을 안줏감으로 삼아 잘근잘근 씹겠는가. 정치가들 때문에 밥맛이 떨어진다는 사람들이 술맛이라도 제대로 맛보자는 생각에 정치가들을 안줏감으로 삼는다. 술맛은 어떤지 몰라도, 밥맛은 떨어지는 세상의 풍경이다.
밥맛 돋우는 세상을 만드는 게 우리 정치가들에게 주어진 노동이 아닐까? 만약 그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은 그렇게 생각한다.
글/배일도 의원(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한나라당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