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국장
다사다난했던 을유년(乙酉年)이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는 사회 각층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고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대형 국책사업들이 기틀을 다지고 경제회복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면서 새해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간 한 해였다.
특히 압축 경제성장 시대부터 누적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경제 양극화 부작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다양한 노력이 돋보인 한 해였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바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이다. 산업부문에서 2005년을 대변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상생(相生)' 이상의 것이 없다.
상생분위기는 일시적인가?
최근 한 조사에서 대·중소기업 간 관계 변화를 체감하느냐는 질문에 중소기업 10곳 중 5곳이 개선을 체감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같은 변화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상생협력 분위기 조성에 나서고, 일부 대기업들이 여기에 호응해 현금결제 확대 등 적극적인 협력업체 지원방침을 발표하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대기업과 정부의 상생협력을 위한 노력의 효과에 대해 일시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 또한 적지 않다. 대기업들이 발표한 상생협력 지원대책이 향후 대ㆍ중소기업 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가져올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을 것'이란 응답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 것도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상생협력에 대한 의심은 오래된 불신의 관행서 비롯
대기업이 협력중소기업에 대한 전격적인 지원방침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소기업들이 근본적인 대·중소기업간의 관계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중소기업 간 오래된 불신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동안 우리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 중 하나는 경제의 두 수레바퀴라 할 수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긴밀하면서도 수직적인 의존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경제에서 수요독점적 위치에 있던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의 우수한 부품을 저렴하게 공급받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글로벌경쟁에 직면한 대기업들이 원가절감 압력의 상당부분을 협력 중소기업에게 전가시키는 상황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종종 대기업 협력업체 담당자나 중소협력업체 대표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다. 대기업 담당자들은 우리 중소기업 역량이 부족해 수평적 파트너십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푸념한다. 반면, 중소기업은 중소기업대로 대기업의 일방적인 단가인하로 인해 고통 받는다고 하소연한다. 거래단절에 대한 우려 때문에 힘의 불균형 관계에서 겪는 불공정행위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상생협력 위한 정부 직접 개입은 신중해야
대ㆍ중소기업 협력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되면서 대기업의 협력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증가에 대한 관심도 높지만, 아울러 힘의 불균형에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거래관행에 대해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주기를 바라는 요구도 비등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대·중소기업 간의 계약 및 가격결정 단계에 개입해 일정기준 이상의 과도한 행위가 이루어질 경우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자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은밀하고 비공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소수의 불공정행위를 개선하기 위해 가격결정 메커니즘에 법과 제도로 직접 개입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잘못 될 경우 기업의 자율·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붕괴되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보장도 없다는 점에서 신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간접적인 경제 조정자로서 정부 역할을 강조하고 싶다. 실태조사 등을 통해 시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 나가겠지만, 대·중소기업 협력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한 계속적인 노력 역시 중요하다.
언론을 비롯한 민간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공론화해 나감으로써 대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부각시키는 간접적인 방식이 기업이미지를 중시하는 대기업들에게 오히려 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우수사례 및 실패사례의 지속적인 소개와 대·중소기업 협력에 대한 통계나 지표의 공표도 또 다른 방법이다.
'위기의 GM과 성공한 도요타' 배울점은 무엇인가?
정부의 협력분위기 조성을 위한 다양한 노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대·중소기업간 '신뢰'다.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인 GM과 도요타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GM은 '글로벌 아웃소싱'을 통한 대량 생산체제로, 도요타는 협력업체와 '카이젠(改善) 활동'을 통한 원가 절감으로 급변하는 시장상황에 대처해 나갔다. 즉, GM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값싼 최적의 부품을 조달 받을 수 있는 체제와 구조를 갖추는 방향으로 나아간 반면, 도요타는 아웃소싱 보다는 협력업체들과 공존공영의 파트너십을 맺어 지속적인 혁신활동으로 원가절감을 실현해 나갔다.
그 결과 GM의 최대 부품업체인 델파이는 법원에 파산보호신청을 냈고 GM 역시 자동차 업계 세계 1위 자리를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반면 하청업체들의 부품제작뿐만 아니라 설계단계까지 공동으로 진행하며, 그 성과를 협력업체들과 공유한 도요타는 수년간 순이익 1조 엔(10조 원)을 넘어서며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업계 2위인 Ford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도요타식 협력모델을 벤치마킹하고 나섰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중소기업의 협력이야말로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이고 진정한 윈-윈 전략이다. 정부의 간접적인 역할도 궁극적인 목표도 자발적 신뢰관계 구축에 있다.
중국 속담에 "느린 것을 걱정하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는 것을 걱정하라(부파만 지파참 不?漫 只?站)"는 말이 있다. 최근 들어 활성화되고 있는 대·중소기업간 협력분위기가 중단 없이 꾸준히 이어져 우리 경제의 상생 협력구조를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글/이기우 국장(중소기업청 중소기업정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