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에코저널=서울】지죽도에서 나와 도착한 곳은 고흥군 도화면 구암리다. 도화면(道化面)은 고려시대 도화현이었다가 조선 세종 때 흥양현에 속했으며, 조선말 흥양군 도화면이 됐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고흥군이 됐다.
도화면 구암리.
북쪽은 풍양면과 포두면에 접하고, 3면은 남해바다에 접한다. 면(面)의 중앙에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계곡이 발달했다. 그곳에 농경지를 조성해 쌀·보리·마늘 등을 생산하고, 해안으로는 김과 미역·굴·꼬막·바지락 등의 양식에 주력한다. 연안 바다에서는 갯장어·도미·갈치 등을 어획한다.
구암리 뒷산 유주산.
구암리(九巖里)는 마을 뒷산에 거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귀암(龜巖)이라고 했으나, 아홉 ‘구(九)’ 자를 사용해 구암이라 부르게 됐다. 본래 해안가에 위치한 어촌 마을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인해 산업구조가 반농반어로 바뀌었다. 자연마을로는 사동, 하동, 상동, 단장, 내촌이 있다. 사동은 과거에 모래가 인상적이었으므로 지어진 이름이고, 하동과 상동은 각각 윗마을, 아랫마을로 이름 붙여졌다. 활개바위가 유명하며 해안 낚시터가 있다.
도화면 당오리.
오전을 당오리에서 마감하고, 다시 이어지는 곳은 도화면 발포리다. 당오리(堂梧里)는 도화면 면소재지로서 도화복지회관, 도화재래시장, 도화초·중· 고등학교, 도화우체국, 도화농협 등이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 넓은 농경지가, 북쪽으로는 산지로 둘러 쌓여있다. 당오리라는 이름은 당곤과 오치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이 두 자연마을 중 오치마을이 커지면서 동쪽은 ‘동오치’, 서쪽은 ‘서오치’가 됐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 ‘신오치’다.
충무사로 가는 길.
발포리(鉢浦里)는 남해바다에 접한 지역으로서 내발항이 있고, 남쪽에는 오동도라는 섬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발포라는 마을이 하나 있다. 발포는 1580년(선조 13)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鉢浦萬戶)를 지내면서 처음 수군으로 머물렀던 곳이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충무사, 만호성, 굴강 등의 많은 역사 유적지와 외가리 도래지, 해수욕장이 있어 상당한 관광명소다.
발포만호 성.
충무사로 가기 위해 홍살문을 지나면 발포만호성이 나온다. 이 성은 조선시대 종4품인 만호(萬戶)가 지휘하던 수군이 있었던 곳이다. 1439년(세종 21) 만호가 배치된 수군진이 됐으며, 1490년(성종 21)에 둘레 1360척(약 626m), 높이 13척(약 6m) 규모로 축성됐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좌수영에 속한 수군진(水軍鎭)으로, 발포만호는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다.
충무사.
충무사(忠武祠)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순신 장군이 38세 때 발포만호로 부임한 뒤 1582년(선조 15) 모함을 받아 파면되기까지 18개월 동안 재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80년에 완공했다.
높은 계단을 올라가 외삼문을 지나고, 정원을 가로질러 또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을 통해 영정을 모신 사당에 다다를 수 있다. 사당의 전체 면적은 4335평이고, 사당은 13평이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탄신제(誕辰祭)를 지낸다.
내삼문.
외삼문.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로 재직할 당시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관내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자 ‘이 나무는 관청의 재물로 함부로 베어 갈 수 없다’고 거절한 일화가 있다.
청렴박석 광장.
이에 고흥군은 청렴 강직한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발포만호 이순신 오동나무 터 조성과 함께 청렴광장을 조성’하게 됐다. 고흥과 처음 인연이 된 발포만호 부임연도를 상징한 1580개의 청렴박석(淸廉薄石)을 분양했고, 이를 포함한 총 6237개의 박석으로 어우러진 ‘청렴박석 광장’을 조성했다.
◆글-와야(瓦也) 정유순
현 양평문인협회 회원
현 에코저널 자문위원
전 전주지방환경청장
전 환경부 한강환경감시대장
홍조근정훈장, 대통령 표창 등 수상